재 침례파(Anabaptists)의 신앙과 순교에 대하여
자료출처
글쓴이: 김이화 (2003/04/14 14:17 올린글)
알베르토 박사는 로마 카톨릭에 의해 가장 많이 핍박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초기 안디옥에 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불리워져 부르던 "그리스도인"(행11:26)들의 신앙을 그대로 이어 받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하는데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가장 많은 핍박과 순교를 당한 그리스도인들을 "재 침례교도(Anabaptists)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재 침례교도"란 성경적인 신앙을 갖지 않고 초기 이교도의 전통이나 관습을 그대로 지켜 오는 혼합 기독교이며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개혁을 했으나 교권제도, 국가 교회조직을 그대 로 가지고 있는 조직교회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인들을 성경과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게 한 후 다시 침례를 받게 하였으며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시작된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도 중생한 후에 다시 침례를 받게 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니라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처럼 다른 사람들 특히 재 침례교도들을 부인하려는 자들이 붙여준 이름이었다(그리스도교 대사전, 902p. - 역자 주).
재 침례교도(Anabaptists)
재 침례교도의 출발에 대하여 교회사 학자들 간에 다소 차이가 있으나 보편적으로 종교개혁 시기에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등에서 급진적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재 침례교도의 시 초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교 대사전에서는 16세기 초에 급진 개혁주의 그리스도인이었던 토마스 뮨져, 휘 브마이에르로 밝히고 있고 윌리스턴 워커(기독교회사 저자)는 그레벨(Conrad Grebel)과 펠렉스 만쯔(Felix Manz) 등이 루터의 개혁에서 버리지 못한 유아세례에 의문을 갖고 역시 스위스에서 국가교회를 주장했다. 또한 유아세례를 주장했던 쯔윙글리(Huldreich Zwingli, 1484- 1531)에게 유아세례에 대한 토론을 벌이다가 그레벨, 만쯔, 휘브마이어 등과 동조하여 1525 년 1월 17일 토론 후, 1월 18일 스위스 정부는 법으로 유아세례를 규정하였고 이에 성서적 이유를 들어 불응한 1525년 1월21일 만쯔의 집에서 기도회를 가진 후 죠지 블라록크 (George Blaurock)가 그레벨에게 침례를 요청하여 시작되었다고 한다(기독교회사, 391p. 윌리 스턴 워커, 류형기 역 - 역자 주). 또 생명의 말씀사에서 출판한 A.M.렌위크, A.M.하만의 공 저 "간추린 교회사"에서는 1522년 취리히의 존경할만한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났고 그들은 "형제"라고 불렀으며 그들은 유아세례를 반대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참으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며 성령의 검과 진리의 말씀만이 유일한 무기라 고 주장했는데 그들이 취리히를 중심으로 1525년부터 스위스, 독일, 스트라스 부르그와 아우구스 부르그에서 많은 부흥을 일으켰다고 한다(간추린 교회사, 114p. - 역자 주)
생명의 말씀사 출판, 교회사 핸드북에는 1523년 후반부터 종교개혁자들이 계속 시행해오 는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거듭난 성도들에게만, 즉 어른으로서 거듭난 성도들에게만 침례를 주는 그리스도인들이 재 침례교도의 시작이었다고 하며 역시 생명의 말씀사 출판 케니스 래 토레트의 저서 "기독교사"에서도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그레벨, 만쯔 등이 쯔윙글리가 두둔 하는 국가교회에 반대하여 "시의 권위자들이 교회를 지배해서는 안된다"는 신앙을 믿고 당 시에 "스위스 형제단(The Swiss Brethren)"이라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시(市)에서 내린 "유아 세례 명령"에 굴복하지 않고 1525년에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침례를 베풀어 시작된 것이 재 침례교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재 침례교도는 초대교회의 신앙을 이어 받은 그리스도인들이다.
재 침례교도들은 로마 카톨릭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안디옥 교회로부터 그 신앙을 받아 들 여 침례교도라는 이름 없이 초기 "그리스도인"(행10:26)이란 이름으로 믿음을 지켜온 그리스도인들이었는데 초기 2세기경에 "세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잘못된 교리가 교회에 들어오면서 세례가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가르쳤기 때문에 세례를 일찍 받는 것이 일찍 구원받는 것으로 오해하여 "유아세례"가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 헬라어 원어에서나 킹제임스성경 에서는 침례(밥티슴,Baptism)로 나와 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어린이들이 세례 받으라는 기록이 없으며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을 모두 내게로 오도록 용납하라고 가르치셨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 이니라"(눅18:16)
로빈슨의 "교회사 연구"에도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의 장년의 침례기록은 있어도 어린이의 세례 기록은 초기 교회사에 전혀 언급이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서기 251년경에 교회가 유아세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시행할 때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 즉 안디옥 교회의 초기 신앙을 이어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유아세례를 부인하는 그리스도인들끼리 모여 새로운 교회모임을 형성해 나갔으며 이미 그때부터 세상 사람들이 붙여준 일명 재 침례교도의 시작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피 흘린 발자취, 18p. J.M 캐롤, 혜남사 - 역 자 주).
그러니까 초기 예수님 때부터 3세기 사이에 없었던 교회의 배도가 시작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린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요3:5) 진리를, 세례를 받음으로 구원받는 것으로 변질시켜서 기왕이면 일찍 구원받겠다고 시작한 유아세례가 교회의 전통이 되어 버렸다. 이때부터 참 교회는 유아세례가 비성경적이라고 거부해 왔기 때문에 재 침례교도들은 결코 16세기에 새롭게 시작된 교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한 가지 참고할 것은 세례(물세례)는 후대 카톨릭에서 시작했으며 초창기는 침례 를 행하였다는 것이다.
재 침례교도가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지켜왔다는 것으로 생명의 말씀사에서 출판 한 "기독교사"에서 케니스 래토레트도 언급하고 있다.
"재 침례파는 기독교의 초창기부터 내재하던 계속되는 물결의 표면화요, 종교개혁을 전후 로 여러 형태로 나타난 조류였다. 그것은 세상의 사악함으로 인해 가능한 세상을 멀리하고, 세상과 별개의 공동체에서 살기 원하던 제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보여졌다."
이렇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거듭난 자들의 침례만 믿고 침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 니라 구원받은 간증, 또는 증표, 순종으로 받았으며 유아 세례하는 자들과는 교제를 갖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유아세례 받은 자들에게는 중생 후에 다시 침례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여러 형태의 그리스도인들의 이름 중 하나로 불리었을 뿐 "재 침례교도(아나뱁티스트)"라고 불리지는 않았었다.
유아세례를 법으로 규정한 교황권
거듭난 사실 없이 이교를 기독교에 혼합시키고 세례가 구원이라고 강제로 신하들을 세례 받게 했고 자신은 죽을 때까지 세례받기를 거부했던 콘스탄틴이(교회사 핸드북, 130p. 피 흘린 발자취, 24p. - 역자 주) 최초에 교권제도를 만들고 312년에 교회와 국가를 만들고 325 년에 니케아 종교회의를 주관했고 같은 해 그는 신하들에게 세례가 구원이라고 강제로 세례를 받게 했다(누룩에 취한 교회, 17p. - 역자 주).
이렇게 제도화된 교권주의 교황제도는 드디어 서기 426년에 법으로 규정됐고 에베소 3차 회의에서 어거스틴의 유아세례 주장을 받아 들였다. 이 때는 이미 교황제도가 준비된 지 오래였고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른 후였고 칼케톤 공의회에서 "마리아 숭배"라 는 이교도 새 마리아 여신(女神) 숭배 사상을 도입한 후였다.
이때부터 안디옥 초대교회 신앙을 이어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오직 성 경에 의한 믿음을 강조해 왔으며 교황권, 제도적, 정치적 교회에 속했던 자나 유아세례를 받았던 자들에게 중생 이후 재 침례를 받게 하였기 때문에 그 때부터 "재 침례교도"라는 새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이다(피 흘린 발자취, 27p. - 역자 주).
초기 2세기 후반에 "세례가 구원"이라는 누룩사상이 들어왔고 그것이 유아세례로 이어진 후, 법으로 제정된 것이 종교개혁 이후까지 약 5천만 명이라는 재 침례교도들의 피를 흘리게 했던 것이다(약5천5백만 명이 정확하다 - 역자 주).
재 침례교도들의 신앙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여기에 교회사 가들의 견해를 들어보고 또한 그리스도교 대사전에는 어떻게 기술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성서만이 교회와 생활의 유일한 표준이 된다. 동시에 성서를 자기 스스로 해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장한다. 국가와 교회는 엄격히 구별된다. 교회는 거듭난 자들의 자발적 모임으로써 침례와 성서의 엄격한 규율은 준수되어진다. 유아세례는 성경에 없으므로 비성서적 이다. 개체교회가 그들의 목사, 직원들을 관리할 수 있다. 초기 교회모양으로 공동생활도 인정 한다."
케니스 래토레트의 저서 "기독교사"에서는 재 침례교도들의 신앙을 어떻게 보았는가?
"재 침례파는 높은 수준의 도덕을 유지했다. 그들의 요청은 종교적이며 또한 윤리적인 것 이었다. 그들은 선행으로 인한 구원을 믿지 않았으나, 참된 구원은 선행을 가져온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이 수준에서 이탈하는 자들을 추방했다. 그들을 가혹하게 비판하는 일부 사람 들 중에도, 그들이 정직하고 화평하며, 음식을 절제하고 신성 모독, 험악한 언어를 삼가며, 온유하며, 탐욕이나 오만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모든 주류 (酒類)를 완전히 삼가 했다. 그들은 '산상보훈(山上寶訓, the Sermon on the Mount)'의 도덕기준에 완전히 일치하여 살려고 노력했다.
윌리스틴 워커 교수의 저서 "기독교회사 - 류형기 역"에서 재 침례교도들의 신앙과 신조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읽어 보자.
"재 침례파 신념을 훌륭히 표시한 자틀러가 쓴 7신조를 채택했다. 우리는 신자의 침례를 믿는다. 교회는 침례를 받고 거듭난 이들이 공동으로 성만찬을 행해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된 지방의 모임이다. 성서는 글자대로 믿을 것이니 신자 생활의 새 율법이다. 교회의 유일 한 무기는 제명(excommunication)이다. 로마교, 루터파, 쯔윙글리파 예배 같은 '육체의 예속' 을 절대 거부한다. 교회마다 자기 교직을 택해 그들에게서 훈련을 받을 것이다. 정부는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아직 필요하나 교인은 거기 참여하지 말 것이다. 교인은 무기를 들거나 강제하거나 맹세를 해서는 안된다. 이상은 후년 침례교회, 회중교회, 퀘이커파(Quakers)에 각 각 영향을 주었고 그들을 통해 영, 미의 종교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끝으로 재 침례교도의 신앙이 옳았으며 카톨릭과 그의 유산들의 일부를 답습하고 있다고 재 침례교도들이 교제를 끊었던 루터파, 칼빈파, 쯔윙글리파들의 재 침례교도에 대한 박해가 잘못되었다는 에딘버러(Edinburgh) 대학의 패터슨(W.P.Paterson) 교수의 견해를 읽어보자.
"퀘이커파(Quakers), 침례교 및 형제교단(Brethren)은 모두 재세례파에서 유래된 것은 아니 지만 재세례파와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에딘버러(Edinburgh) 대학의 패터슨(W.P.Paterson) 교수는 그들에 관한 입장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였다."
개신교 전통에서는 재세례파의 이상 속에 들어 있던 도덕적 이상주의를 간과하고 가장 나쁜 경우를 가지고 재세례파 운동을 단정하였으며 또한 소수의 사람에게만 해당될 파문을 모 든 사람들에게 선고했음이 분명하다. 후브마이어(Hubmaier)와 뎅크(Denck)와 같은 인물 그리 고 사형장까지 그들을 따라 간 수많은 사람들이 미쩌와 레이덴의 죤(John of Leyden)과 같이 정죄되었다는 것은 실로 역사의 비극 중 하나이다.
지금까지 몇 가지의 자료를 검토해 볼 때에 재 침례교도들은 성경에 언급된 침례만 믿었고 유아세례를 부인했으며 침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간증으로, 순종으로 행했으며, 오직 성 경만 믿었고 교권제도를 거부했으며, 철저한 경건생활을 구원의 증거로 행했으며, 로마 교황 청, 카톨릭과 타협을 거부했으며, 순수한 신앙을 지켜왔음이 밝혀졌기에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그대로 이어온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로마 카톨릭은 기독교의 한 파가 아니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대량 학살했던 이단 중의 이단인 것이다.
재 침례교도들의 순교와 핍박받은 역사
사실 예수 그리스도 이후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피 흘림의 역사는 재 침례교도의 순교사, 박 해사의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유아세례를 거부한 것 때문에 붙혀진 "재 침례교도"란 이름을 가졌으나 사실은 초대 안디옥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었던 루터나 칼빈, 쯔윙글리 등은 카톨릭의 교리, 관습 등 을 상당히 그대로 유지해오고 있었는데 유아세례를 시행하였고(기독교사, 409p. - 역자 주) 당시 사회 전체를 눈에 보이는 가시적(可視的) 교회로 끌어들이려 했으며 교회와 국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이었던 재 침례교도들은 초기에는 이러한 개혁자들을 도와주었는데 나중 에는 카톨릭 교황권이 만들어 놓은 유아세례를 주장하는 칼빈(기독교강요, 548p. 존 칼빈, 세 종문화사 - 역자 주)이나 국가와 교회를 연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쯔윙글리, 그리고 역 시 유아세례를 주장하는 루터 등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이단"이라는 모함까지 들었으며, 또 한 이들은 본래부터 핍박자였던 로마 카톨릭을 위시하여 전에는 동지였던 루터, 쯔윙글리, 칼빈 등 개혁자들과 그리고 후에 영국 성공회까지 가세한 세력으로부터 수많은 핍박과 학살 을 당해야만 했다.
종교개혁 시대의 재 침례교도 리더였던 그레벨(Grebel)과 만쯔(Manz)는 취리히 市에서 체포 되어 1527년 1월 25일 물에 익사당해 순교했고(기독교사, 412p. - 역자 주) 휘브마에르 (Hubmaier)는 1528년 3월 10일 오스트리아에서 체포되어 비엔나에서 화형당해 순교했으며 역시 재 침례교도였던 "마이클 새틀러(Michael Satteler)"는 1527년 5월에 화형되었다.
1528년 1월 8일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드가 재 침례 금지령을 내리고 그의 형 찰스 5세 가 후원에서 1529년에는 "뉴파이에르"에서 1530년에는 "아우스 북"의 국회에서 카톨릭 개신교의 공동으로 재 침례교도들에 옛 로마 이단법 적용을 결의하여 이후부터 재 침례교도는 사형에 처해졌는데 오스트리아, 독일, 바바리아에서는 철저히 시행됐고 복음주의 지역에서는 치안 죄로 다스렸으며 국교로 돌아오기를 거절하면 추방, 투옥, 사형에 처했다.
1520년대 후반과 1530년대 초반에는 수많은 재 침례교도들이 참수형이나 화형에 처해 순교 당했던 것이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주장인 유아세례를 지켰기 때문에 재 침례교도를 핍박하는데 협조했고 루터나 쯔윙글리 등은 재 침례교도들의 유아세례 거부와 국교를 부인한 것 때문에 로마 카톨 릭 교회와 공조하여 재 침례교도들의 핍박에 동조하였다.
"이 특수한 개혁을 요구하는 이 새로운 단체의 확고한 주장은 그들의 머리 위에 카톨릭 교회나 루터 교회 그리고 장로교회와 영국 교회 등 모든 기성 교회로부터 가혹한 핍박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교파 역시 카톨릭의 교회가 범한 수많은 과오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유아 침례 또는 침수례(浸水禮) 대신에 적수례(赤水禮)나 주수례(注水禮)를 베푼 것이다." (피 흘린 발자취, 57p. - 역자 주)
"루터교회나 장로교회, 그들은 다 카톨릭의 모교회(母敎會)에서 많은 악습을 그냥 계승하게 되었던 것인데 그 중 하나는 국가 교회라는 관념이었다. 이 두 교파는 곧 국교가 되었고 그들은 다 카톨릭의 모교회 보다는 조금 못하였다 할지라도 곧 핍박을 일삼게 되었던 것이 다." (피 흘린 발자취, 49p. - 역자 주)
"제 17세기 동안에는 왈덴시스, 아나뱁티스트 및 뱁티스트 교도들에 대한 치명적인 박해 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영국에서는 존 번연과 여러 사람들이 증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영국 교회에 의하여, 독일에서는 루터 교도들에게, 스코틀랜드에서는 스코들랜드 교회(장 로회)에 의하여, 이태리와 불란서 그리고 법왕의 제도가 권력을 잡고 있었던 모든 곳에서는 카톨릭교도들이 그들을 핍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 흘린 발자취, 59p. - 역자 주)
"그러나 박해는 그치지 않았다. 미움을 받았던 아나뱁티스트들은 (지금은 뱁티스트라 불리 운다) 이전의 그 모든 박해에도 불구하고 또한 오천만이라는 사람들이 이미 순교자로서의 죽음을 당하였다는 이 무서운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많은 무리들이 생존해 있었다. 외길로 되어 있는 구라파의 일등 도로가에 30마일의 거리를 두고 신작로를 따라 두서너 자의 간격으로 화형의 말뚝이 하나씩 꽂혔고 그 뾰족한 말뚝 끝마다 순교당한 재 침례교도들의 피 묻은 머리가 달렸던 것도 바로 이 시대에 일어난 일이었다. 인간의 상상으로 이렇게 무서운 광경을 그려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더욱이 믿을 만한 역사에 의하면 이러한 일을 행한 것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제자라 자칭하는 사람들 이었다는 것이다."(피 흘린 발자취, 53p. - 역자 주)
최근 알베르토 박사를 모함하는 자들이 있는데, 루터나 칼빈, 쯔윙글리 등이 주장했던 국가적 제도정치 교회는 어거스틴이 맨 처음 주장했고 은혜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세례에 의한 구원이라는 배교적 사상에서 유래된 사실을 알고 426년 교황권이 법으로 제정한 유아 세례 를 집행하는 것에 대한 타협을 거부하며 믿음의 정절을 지켜왔던 진실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인 재 침례파를 사이비로 몰아붙이는 자료들만 가지고 알베르토 박사의 진실을 왜곡하려 했으나 그들은 실패했으며 로마 카톨릭에 의한 재 침례교도의 학살은 순수한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이었음이 여지없이 증명된 것이다. 이제 영국 옥스퍼드 대학과 벨지움의 루벵 루 벵느 대학에서 선교학과 역사학을 공부했던 구영재 선교사의 재 침례교도에 대한 견해를 읽어보고 그들이 얼마나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었는가를 알아보자.
"교회의 타락에 대한 재 침례교도들의 해석은 개혁자들과는 매우 다르다. 개혁자들은 분명 히 콘스탄틴 시대를 교회의 승리의 시기로 보는 로마 카톨릭의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콘스탄틴 통합"의 희생물이 되었으며, 이 통합은 그들이 편리하게 간과해 버리거나 또는 그리스도교 화하여 통제하려고 했던 이교주의를 포함하고 있는 비 그리스도교의 의식적인 사회를 부지중에 흡수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개혁이란 교황권에 대한 반동이었지 로마 카톨릭의 제도로써의 교회 의 개념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구교가 여러 가지 부패와 잘못으로부터 정화될 필요 가 있다고는 믿었지만 교회라는 전체적 일치감에서 제외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로마 카톨 릭과 조직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이후에도 그들은 계속 개혁 이전의 로마교회와의 연속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 당시 개혁자들의 눈에는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 조직은 교회가 아니었다고는 보지 않았 다. 이것이 바로 재 침례교도들이 개혁자들을 완전한 개혁자로 보지 않은 이유였다. 그들에게 는 개혁자들이 독립지역교회를 시작하므로 타락한 교회로 그대로 남아있다고 본 것이다.
재 침례교도들에게 있어서 로마 카톨릭은 절대적으로 타락한 것이었다. 콘스탄틴 대제에 의한 교회와 국가의 통합은 온갖 무서운 결과를 초래했다. 유아세례가 바로 이러한 것 중의 하나였다. 메노는 '유아세례를 강제적으로 시행하게 했던 A.D. 407년의 이노센트 1세의 칙령을 타락의 절정으로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휘브마이어도 또한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는 '침례받기 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라는 책자에서 침례서약 에 대하여 한스의 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이와 같은 침례서약은 천년의 기간 동안 잃어버려져 있었고 사단은 수도사 서약과 사제 서약을 가지고 밀고 들어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의 자리를 스스로 차지해 왔다.'
유아세례가 일반적으로 행해지게 되었을 때, 거듭난 사람들의 교제권으로써 교회의 특성 은 심각하게 변해버렸고, 교회와 국가의 통합과 더불어 국가교회(the state church)에 복종을 강요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게 되면서 교회는 완전히 타락한 것이었다. 베르두인(Verduin) 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의 타락은 그리스도의 신부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형시켰다. 치유와 구제의 사명을 띠고 보냄을 받은 교회는 현대적 경찰국가의 형태를 가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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