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저급한 기독교 운동
Chapter 1. 신사도 운동, 그 근원과 전개
1. 신사도 운동, 새로운 종교개혁인가?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는 “새로운 사도적 종교개혁”이라는 현란한 수사로 자신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이들은 비성경적이며 복음에서 벗어난 주장을 하기 때문에 기독교 정통 교단에서 받아주지 않는다. 오직 자신을 따르는 무리만을 인정하고, ‘신사도’라는 이름을 주면서 추종자들을 추려 세워주고, 순수한 교회의 전통을 허물고 있다.
이들 신사도 운동가들은 성경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헐고 있는 앞자이들이며, 예언을 가장하여 성경을 무너뜨리는 자들이다. 이처럼 ‘신사도’가 첨가된 ‘새 종교개혁’은 완전히 급조된 운동이요, 거짓된 단어이다. 와그너가 신사도 사역이라고 주장하는 내용들은 적어도 100여년 전 이미 미국 땅에 있었던 것들이다.
2. 존 윔버와 빈야드 운동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은 퀘이커파와 달리, 1940년대 미국 오순절파에서 활약하던 윌리암 브랜햄, 오럴 로버츠, 캐터린 쿨만 등 세 사람의 신비적인 치유 운동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빈야드 운동은 오순절 교단에서 이단성을 파악하고 추방한 ‘늦은 비’ 운동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윔버는 능력종교를 지향하여, ‘Power Evangelism,' 'Power Healing,' 'Power Points,' 'Power Encounter'를 사역의 중심에 두었다. 빈야드 운동에 속한 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체험과 병고침의 은사를 압도하는 에언을 흠모하였다. 예언은 1900년대 초반의 방언은사, 1950년대의 병고침, 1980년대의 능력체험을 모두 다 압다하고 말았다. 예언은 모든 것을 능가하며, 모든 은사들보다 우선에 선다. 빈야드 운동이 몰고 온 피해를 엄청나게 입었던 한국 교회는 정신차려서 분별해야 하겠다.
3. 19세기 ‘성결운동,’‘늦은 비’와 ‘하베스트’(추수)
마태복음 24장 14절에 대한 체험적인 응답에서 비롯된 ‘성결운동’에 대한 강조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재림이 오기 전에 마지막 때를 알리자는 열심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성결체험’을 하는 것으로 이해했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감을 가지고 헌신했다. 하지만 이들의 구호는 전혀 성경적인 배경과 의미와는 다르게 ‘알레고리’(풍유법) 성경해석이 첨가되어서 완전히 변질되었다.
4. 방언파의 창시자 파햄과 초기 오순절 운동
웨슬레에게 영향을 받은 감리교 먹사 찰스 파햄(Charles Paham, 1873-1929)은 ‘늦은 비’와 ‘오순절’의 연관성을 새롭게 연결시켰다. 그의 새로운 발견은 방언은사였다. 방언이 성령세례의 상징이요, 마지막 날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늦은 비’는 성결생활의 체험이 아니라,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파햄과 그를 따르는 초기 오순절파는 ‘방언’에만 집중하였다. 그는 방언이야 말로 전 세계가 빨리 복음을 듣게 하는 도구가 된다고 하였다.
5. 브랜험, 사도적 교회와 직분의 회복자인가?
브랜햄의 이류들은 몇 그룹으로 분파되어 있다. 죠지 허틴, 힌트는 카나다 뱅쿠버에서 브랜햄의 설교를 듣고 난 후, 카나다 노스 배틀퍼드로 이런 개념들을 가져다가 사스카취완이라는 곳에서 ‘늦은 비’ 운동이라는 이단적인 부흥집회를 열었다. 여러 곳으로 순회하여 돌아다니면서 이들 자칭 선지자들이 개인적인 예언을 하여 주고, 손을 얹어서 안수기도를 하는 가운데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주는 형태가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는 제한적이던 은사들이었으나, 이제 사도의 직분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회복된 사도와 선지자에게 사도적 은사들도 추가로 주어졌다고 강조했다. 사도적 교회의 회복은 사도의 직분회복이요, 사도적인 은사들의 회복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 “늦은 비의 새로운 질서”(the New Order of the Latter Rain, NOCR)라는 모임이 구체적으로 시작되었다.
6.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하나님의 나라’는 국가나 조건이 아니요, 만들어진 하나의 사회조직도 아니고, 마치 사회복음의 교리처럼 사람에 의해서 준비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상의 발전과 함께 오는 내재적인 것도 아니요, 인간의 도덕적 행동으로 성취되는 것도 아니다. 즉 하나님을 위해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들이 기도하고 기다리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가 되는 신적인 능력이 작용해서 시작된다.
7.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The Manifested Sons of God)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사역을 이루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나타난다는 말은 마이크 비클이 젊은이 사역을 강조하는데서도 나타난다.
Chapter 2. 최고 예언가 폴 케인의 몰락
1. 윌리엄 브랜햄을 흉내냄
폴 케인은 1929년 택사스 주, 갈란드에 있는 아주 작은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케인은 초자연적인 영의 세계와 앞날에 대해서 미리 아는 영적 은사를 가지고 있던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증조할머니의 은사가 대를 이어서 자신에게도 물려졌다고 믿었고, 어떤 사람이 고침음 받게 되거나, 살아나거나 혹은 사망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자신이 미리 알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여덟 살 때에, 처음으로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자신을 불렀다고 주장했던 케인은 이단으로 정죄를 당하였지만, 일부 신비주의자들에게 영웅으로 추앙을 받았던 윌리엄 브랜햄이 하나님의 부름을 아주 어린 시절에 받았다고 했던 이야기와 케인의 부르심이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브랜햄은 일곱 살 때에 천사가 나타나서 자신에게 말했다고 주장하였다.
폴 케인이 캔사스시티에서 마이크 비클과 추종자들 앞에 섰을 때에, 그는 자신의 탁월함을 입증하는 신비로운 체험을 자랑으로 내세웠다. 마치 브랜햄이 가졌던 체험에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대입시켜서 멋지게 포장하였던 것 같다. 곧바로 캔사스 시티에서는 폴 케인이 최고의 예언자, 최대의 선지자가 되었다. 그는 ‘초급’ 예언가들 앞에서 ‘최고수’ 브랜햄을 능가하는 방법을 구사하기 시작했으니, 예언의 내용과 구성에서 월등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 독신주의와 금욕을 자랑하다 무너짐
금욕주의 자들은 육체를 부정한다. 그들은 육신을 가진 인간이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악하다고 생각한다. 툭히, 결혼과 출산에 대해서 금기시한다. 그래서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들은 극도로 엄격한 채식주의만을 고집한다. 육체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생활의 규칙을 까다롭게 지켜나가야 한다고 하면서, 지상에서 얻는 위로와 평안함은 그 어떤 것이라도 부정해 버린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금욕주의와는 반대의 가르침을 주신다. 딤4:1·5을 보면, 사람의 거룩성은 외적인 것이 아니다. 폴 케인이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굳은 의지로 살아갔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주님이 자신에게 말했다고 하면서 오히려 성경에 도전하는 말을 서슴지 않게 했다.
3. 윔버, 존스, 비클의 영웅?
존 윔버는 폴 케인이 빈야드 운동을 위해 새로운 차원의 능력과 권능과 기사와 이적을 가지고 왔다고 고무되었다. “나는 육체적으로 예수님이 찾아와서 가슴을 만져주시는 것을 여러 차례 체험하였다. 그리고 난 후 나의 모든 성적인 욕망이 내 몸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지난 40년 동안 전혀 성적인 욕정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윔버는 이런 대단한 선지자 앞에서 그만 현혹되고 말았다. 적당한 능력체험으로 사람들을 속이던 작은 가짜 운동가가 아예 처음부터 지진을 예언하여 맞춰줌으로써 속이려 하니 분간을 못하게 된 것이다.
1989년 2월 12일, 윔버의 강단에서 폴 케인이 나가서 실로 엄청난 예언들을 선포하게 된다. 그리고 이날부터 폴 케인은 세상에서 둘도 없는 선지자, 새 사도가 되어서 전 세계를 휩쓸고 돌아다니게 된다. 빈야드 소속 많은 목회자들이 앞다투어 그를 초대해 강단에 세우게 된 것이다. 존 윔버는 폴 케인을 마치 사도 바울처럼 숭배하기에 이른다.
4. 폴 케인의 비참한 퇴장
노년기에 이른 풀 케인은 자칭 사도들, 자칭 예언자들 사이에서 철저히 배척당하리만큼 인격적으로나 사역적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은 그의 예언의 거짓됨을 만천하에 드러내게 하였다. 인기와 선망의 대상이요, 받은 예언으로 세상 사람들의 일을 다 알아맞히는 자가 어찌하여 이렇게 추락하고 말았는가? 그는 반야드 운동에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가는 곳곳마다 대우를 받고 최고급 일류 호텔에 묵으면서 부요해지고 풍요로움을 누리게 되었지만, 불안하고 외로웠던 것이다. 한 때 그를 극진히 따랐던 윔버와 반야드 운동에 속한 교회와 목회자들, 캔사스 시티 예언가들, 오순절과 성령운동가들 모두 다 충격을 받았다. 이처럼 거짓 예언가들의 행보는 속이고 감추다가 결국 망하게 된다. 이단에 속하여 무작정 따라가면 이렇게 서로 망하게 되는 것이다.
Chapter 3. I.H.O.P와 마이크 비클의 문제점
1. IHOP(국제기도의 집)은 가짜들의 천국
가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24시간 7일 연속 기도회’를 연다고 홍보해서 사람들을 모아가지고, 또 다른 거짓 예언을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들이 폭발적인 관심을 끌게 되자. ‘24시간 365일 연속기도회’로 확정하여 독특한 형태의 찬송과 예배로 인해서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 참가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은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특별집회를 설정하고 2011년 2월 14-20일에 ‘종말예언’ 큰 모임을 갖는다고 홍보했다. 그러면 도대체 왜 그가 한국인을 위한 집회를 한다고 떠들어댔는가? 한국 사람들을 모아서 자기들에게 헌금하게 하고, 순진한 자들을 추종세력으로 끌어넣은 것 밖에는 없다. 그가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준 유익은 아무 것도 없다.
2. 참된 기도와 거짓 기도를 분별하라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견고히 붙잡고 믿는 자라고 한다면, 기도운동을 빙자한 미혹의 영들과 인본주의자들의 간교함을 정확히 진단하여야 한다. 그리고 기도하는데 무엇이 나쁘냐고 그저 감정적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기도는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특히, 사람들에게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예수님은 보이기 위한 기도, 위선적으로 드리는 기도를 철저히 경계하신다. 따라서 지금 IHOP(국제기도의 집)에 있는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국제기도의 집’의 배면에 숨겨 있는 핵심 교리들은 기존의 정통 교회를 완전히 부정하는 극단적인 은사주의적 이단사상에 깊이 연결되어 있다. 이런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구원의 도리를 왜곡하는 미혹이요, 간교한 조작들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형제에 대해서 사랑하는 심정을 가져야만 하지만, 거짓된 복음과는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3. 어니 그루웬 목사의 폭로와 증언들
이들이 처음 세운 ‘캔사스 시티 펠로쉽’이라는 모임은 어느 교파와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정체불명의 집단으로 시작한 것이다. 캔사스에서 소수의 그룹과 시작할 때에는 예언 은사에만 집중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다가 점차 예언은사를 개발해서 동조하는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고 이런 일을 하나님이 지시했다고 합리화 하고 있다.
그루웬 목사는 소위 선지자라고 자칭하면서, 예언 사역을 남용하고 거짓말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목격하게 되면서, ‘캔사스 시티 펠로쉽’의 문제점들에 대해서 낱낱이 양심선언을 하였다. 그루웬 목사가 ‘캔사스 시티 팰로쉽’의 예언 사역이 조작된 가짜들이며, 속임수에서 나온 이단이라는 주장을 근거있게 제시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서게 되었다. 그루웬 목사의 설교와 증언들을 듣고난 후, 돌아서기로 확정을 하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
4. IHOP(국제기도의 집)의 신학적인 문제점들
참된 지식과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오직 성경에서만 찾아야 하고, 성경을 통해서 입증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아는 지식에 있다. 그리고 그 성경을 기록하도록 감동을 주신 성령님이 마음을 열어서 거듭나게 하셔야만 깨닫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직면한 국제기도의 집은 성경적으로 입증된 복음과 객관적으로 검증된 신앙의 기준을 벗어나서 너무나 변질된 내용들로 구성된 사이버 기독교를 가르치고 있다. IHOP에서의 성경왜곡은 그들이 가르치는 모든 항목에 걸쳐서 두루 일어나고 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의 전개과정이라는 성경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무시하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해석을 하지 않으며, 계시의 구속사적 점진성과 일관성을 총체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지금 IHOP에서 하고 있는 연속기도라는 방식은 성경 어디에도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여기 저기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사건들과 기도의 사람들에게서 짜깁기 형식으로 임의대로 연계시킨 후, 이를 영적으로 비약해 버린 것에 불과하다. 이들의 기도모임에는 성경적인 신실함과 순결함과 순수함을 찾아볼 수 없다. 마이크 비클이 시작한 기도운동은 일종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특이한 현상을 체험하려는 방법론이다. 기도는 단지 사람들을 미혹하여 모이게 하는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결국, 마이크 비클이 세운 IHOP“국제기도의 집”은 교회론의 변질이요,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것이 확실하다.
Chapter 4. 비클과 직통계시파의 문제점
1. 이단은 저급한 은사운동의 뿌리에서 출현함
마이크 비클은 캔사스에서 어린 시절 성장하였고, 지금 주요 사역지도 역시 캔사스 시티이다. 하지만 1976년부터 1982년까지 그의 첫 목회사역은 세인트 루이스 서쪽 지역에서 스물 다섯 명의 청소년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당신에 비클은 미주리 로즈버드에서 교회를 세우려다가 실패하고, 세인트 루이스로 돌아와서 “뉴 커버넌트 펠로쉽‘ 교회의 청소년 목사로 있으면서, ”남부 세인트 루이스 펠로쉽“(South St Louis Fellowship)이라는 교회를 두 번째로 세우고자 약 1년 반 동안 노력했다. 푸트남(Gene Putnam)이 목회하던 교회가 거의 죽어가는 상황에 처했을 때 서로 합하였고, 그때에 좀 더 급진적인 형식을 받아들여서 춤을 추는 식으로 변해갔다고 한다.
2. 신비주의 예언을 따름
마이크 비클은 그전에 알지 못하던 예언자, 어거스틴 알카라(Augustine Alcala)라는 선지자가 교회의 모임 시간에 일어나서 공개적으로 “주님은 너와 너의 아내 다이앤의 갈 길을 다시 지도하고 계시는데, 너는 앞으로 캔사스 시티로 돌아가게 될 것이고, 새로은 교회를 세우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을 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캔사스 시티”로 이사해서 하나님의 사역을 하기를 원하신다“는 예언을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즉 이전에는 이런 예언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비로소 이 무렵부터 아주 극단적인 신비주의자들의 초자연적인 예언에 대해서 개인적인 접촉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단들은 오직 특정인 한 사람의 권위에만 의존하도록 교묘한 전술을 구사한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결정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예언자를 이용한다.
3. 침대신학의 위험성
신학이란 학문을 마이크 비클은 매우 얕잡아 보고 있다. 정규학교에서 공부하는 신학을 조롱하는 그는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 1982년 9월 인도와 한국을 거쳐서 이집트 카이로에 머물고 있던 중, 호텔 방에서 “내적으로 울리는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마이크 비클은 정상적인 신학훈련을 받지 않았으므로 그가 주위에서 보고 배운 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침대에서 신학을 마쳤다고 한다. 스스로 교회를 차리고, 스스로 인정하여 어느 날부터 말슴의 사역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전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4. 밥 존스의 망토
초기 시절에 마이크 비클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출발을 신비스럽게 해 주는 밥 존스의 예언을 항상 내세운다. 그래서 그 예언의 내용을 따르면 마이크 비클이 성령의 권능을 받은 ‘운동’으 주역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후에는 개인적으로 밥 존스를 신뢰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멸시하고 깍아내리고 있다. 자신이 필요할 때는 누군가의 권위를 사용하고, 그가 더 이상 가치없는 인간으로 전락하게 되자 더 이상 신뢰를 하지 않는 천박한 인격을 드러내고 있다.
5. 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종 : 양태론과 젊은이 사역
IHOP에 관계된 사역에서나, 마이크 비클의 설교에서나 동일하게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어 있다. 또한 기독교의 중심진리가 실종되어 있다. 처음 그의 선지자 사역의 부르심을 이야기 하는 목회 초기부터 마이크 비클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존경하고 순종하는 믿음생활이 아니라, 자신의 영적인 힘을 발휘하는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음이 드러난다. 또한 성령운동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성령이 역사하고 있는 현장에 나타나야 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빈약하다.
이단의 증거가 명백히 드러나는 거짓 기도교이자 헛된 가르침은 마이크 비클이 핵심적으로 강조하는 젊은이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전략 가운데서 드러난다. 국제 기도의 집은 두 부류, 즉, 미래의 주역이 될 젊은이들과 아주 발전이 느리고 평범한 기독신자들에게 집중적으로 접그하고 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적인 사역을 강조하고 있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장래에 대한 환상과 망상을 갖게 한다. 그가 주장하는 걺은이들의 예언운동에는 하나님의 신성이나 계획은 개수롭지 않게 본다. 이처럼 사람들의 운동만이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강조되어지고, 하나님의 신적인 계획과 그분의 통치를 변질시키는 것은 기독교의 이단이다. 가장 핵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6. 비클은 예언을 받은 선지자인가?
마이크 비클은 자신이 예언운동을 일으키는 새로운 질서의 주인공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될 수 없고, 그는 예언자도 아니다. 그가 하고 있는 소위 예언이란 것들은 모두 다 사람에 대해서 하는 일종의 속임수이다. 그의 가르침들은 성경이 전하는 “믿음의 분수”에 맞지 않는다. 그의 모든 사역의 목표지점은 무엇인가? 그는 예언자로서, 선지자로서 오직 자신의 명예만을 널리 알리려는 “운동”에 빠져 있다. 그가 강조하는 바는, 온전한 예수님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시작한 새로운 질서, 선부, 기름부음, 마지막 때 등이다.
마이크 비클은 하나님의 사도들에 의해서 주어진 예언과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서 주시는 조명의 차이를 전혀 구별하지 못하는 신학적인 혼돈에 빠져 있다. 마이크 비클의 경우, 성령님의 영감에 관하여는 전혀 상관도 하지 않고, 오직 사람들에 관한 예언들을 말하면서 공포와 두려움, 기대와 허상된 업적 등을 자랑하면서 자신의 독보적인 위치를 견고히 하려고만 했다. 그의 비전과 꿈은 하나님의 나라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단지 그의 영웅심과 엘리트주의에 비위를 맞추는 자들이 있을 뿐이다.
Chapter 5. 자칭 선지자들의 예언과 그 실상
1. "3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다“
마이크 비클은 우리는 날마다 가뭄 현상을 목격하고 체험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혀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꾸며서 몇 년 후에 퍼트린 것이다.
2. “6개월 내에 30세 이하 여섯 명이 죽을 것이다”
예언자로서 개인적인 신빙성을 얻으려는 목적 하에 완전히 날조된 것이다.
3. 1,000명이 죽을 것이다.
하지만 ‘미친 개’에 해당하는 반대자들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
4. “다섯 가지 심판이 미국에 내릴 것이다”
미국의 경제위기는 항상, 그리고 오늘도 계속되고 있으며, 동시에 복구와 회복의 노력이 수반되어서 어느 때에나 국가적인 안정감을 잃지 않고 있다.
5. “경제적 위기가 있을 것이다”
1988년 밥 존스는 국가의 경제적 붕괴 위기를 예언했다고 한다.
6. “클린턴이 변화하라?”
그는 빌 클린턴이 하나님에 의해서 변화를 받아, 깊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정책을 수행할 것이며, 이로 인해서 그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자들도 놀라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시적인 거짓 예언으로 사람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유발한 것에 불과하다.
Chapter 6. 마이크 비클의 비윤리적인 언행들
1. 추앙하던 밥 존스를 깎아내림
자칭 선지자로 둔갑하여 수많은 사람을 교육하고, ‘운동’ (movement)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마이크 비클은 신뢰성이 없는 언행을 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마이크 비클은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밥 존스를 높이 평가하지만, 개인적으로 만나는 자리에서는 밥 존스에 대해서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
2. 교회 설립을 하지 않는다는 거짓말
마이크 비클은 캔사스 시티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의 북쪽에서는 교회를 설립할 의향이 없다고 지역 목회자에게 말했다. 그런데, 나중에 말을 바꿔서, 하나님이 주신 증거들에 의하여 그곳에 수 백명의 구원받을 자들이 자신의 목회 활동여하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3. 교세 확장을 위한 전략적 합병과 약속 불이행
마이크 비클이 이끄는 ‘캔사스 시티 펠로쉽’과 합병을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재정이 부족했다. 그래서 서로 합하게 되면, 재정압박에서 벗어나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처음에 했던 약속을 전혀 지키지 않았다고 개탄했다.
4. 한국 성도들을 미혹하는 종말예고 집회
북한이 남한의 연평도를 예고 없이 공격한 일로 모든 한국인들이 공포와 두려움에 처해 있었다. 바로 3일 후에, IHOP국제 기도의 집에서는 한국인을 위한 집회 개최를 결정하고, 홍보용 영상물을 내어 놓았다. 그리고 한국 종말에 대한 집회에 등록비를 현금으로 내고, 조직에 가입하도록 권장하였다. 캔사스 선지자들은 한국 교회 성도들의 마음을 빼앗고,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며, 예언의 은사가 종결되었다고 주장하는 목회자들을 쓰러트리고 말 것이다. 이들의 운동은 선교가 아니며, 이들의 예언은 성경과 전혀 맞지 않다.
5. 예언의 실패는 아예 삭제해 버림
마이크 비클에게는 중풍으로 몸이 마비된 팻 비클(Pat Bickle)이라는 이름의 친 동생이 있었다. 마이크 비클의 기도와 집회사에 이 불행한 동생이 어느 날 완전히 나을 것이라는 예언은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2007년 5월, 불행하게도 팻 비클은 수년간의 장애인 생애를 마치고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토록 자주 언급되었던 예언은 더 이상 역사에 남지도 않고 지워져 버렸다.
6. 누구의 재산인가?
다이안느 비클(Diane Bickle)은 IHOP의 모든 재단과 많은 재산들과 건물들을 총괄하고 있다. 이곳은 교회조직이 아니며 더구나 선교단체도 아니고, 가족끼리 운영하는 비영리 단체다.
7. 신비적인 은사들과 체험적 신앙
현대 사회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문화는 이전 세대와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성경해석도, 신학의 체계도 철저하게 개인적이요, 체험적이며, 주관적이며, 상대적이요, 관계중심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들이 기독교에 깊이 영향을 끼쳐서, 내가 받고자 하는 현상적 체험을 원한다. 21세기 현대인들은 자신의 몸으로 체험하는 것을 좋아하는 세대이다. 이런 시류에 따르는 자들이 ‘능력’ 체험이라는 상품을 만들어 놓고 기독교의 가르침을 변질시키고 있다,
Chapter 7. 가짜 부흥운동의 이합집산
1. 위기에 처한 빈야드 운동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과 마이크 비클을 비롯한 캔사스 예언가들이 1989년부터 서로 결합했다가 긴장관계가 형성되어 다시 1991년부터 서서히 각각 갈라서다가 1995년에 완전히 분리하게 된다. 한편, 캔사스 IHOP의 예언가들은 어니 그루엔 목사의 보고서로 인해서 자신들의 정체가 폭로되니까 누군가의 인정을 받아야 할 절실한 시점에 놓이게 되었다.
이들 두 집단이 서로의 입장을 세우려는 동기에서 한 단체로 뭉치게 되었는데, 얼마 못가서 다시 분열하였다. 이것은 이들 집단의 정체성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이다. 자신들의 집단을 더 돋보이게 하려고 전략상 필요한 때는 합쳐서 서로를 이용하려 한 것이다. 이것은 거짓된 부흥운동의 중심진리가 헛된 것임을 드러내는 명백한 증거이다.
2. 왜그너와 윔버의 변질된 교회 성장론
빈야드 운동은 주로 소지를 안고 있었다. 존 윔버는 “처음에는 예배와 치유였고, 신약성경에 나와 있듯이 예언으로 적합한 균형을 맞추게 될 것이다”고 하면서 방향 수정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이런 윔버의 기대는 불과 2년을 넘기지 못하고 깨어졌다. 빈야드 운동을 일으킨 존 윔버(John Wimber. 1934~1997)는 요바 린다에서 퀘이커 회중들 속에서 신유은사 운동을 전개하다가, 갈보리 채플에 속하여 척 스미스와 함께 해 보려고 하였다. 1983년까지 약 2천명의 성도를 모으게 되면서 주목을 받게 된 윔버는 풀러신학교 선교대학원에서 처음 개설된 “교회성장학”이라는 과목의 기초설계자가 되었다. 교회가 모이는 사람들의 숫자와 영향력 있는 교인들, 헌금 등등 구체적으로 입증되는 숫자로 ‘교회’의 성공을 측정하는 것은 세속적인 방법론이다. 윔버의 교회성장학 수업은 자신의 특기를 살려서 능력체험의 현장이 되었다. 이때까지 자신의 강의를 수강한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빈야드 운동’을 전개하였고, 왜그너 교수는 ‘제3의 물결’이라고 홍보를 했다. 하지만, 빈야드 운동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게 일어났다. 이때부터 미국 전역에서 공개적이며, 학문적인 비판과 공격이 일어났다.
큰 교회를 이끌고 있는 영향력 있던 지도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게되자 윔버는 성령의 치유은사를 강력히 표방하던 사역에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3. 빈야드 운동이 망쳐놓은 한국 교회
한국 교회에서는 1985년에 풀러신학대학원에서 일어난 이 소동을 알지 못한 채, 윔버의 모든 사역들은 성령운동이라고 하여 받아들였고, 이를 거부하는 기성 교회들은 구시대적인 교회라고 조롱을 받았다. 빈야드 운동은 한국 교회에 너무도 큰 피해를 끼쳤다. 1995년을 전후하여 한국 교회에서는 성령론의 오류, 특이한 체험현상의 강조, 무질서한 예배 행위 때문에 빈야드 운동의 도입을 거부했고, 참여를 금지시켯으나 일부 한국 교회는 빈야드 운동에 엄청나게 깊히 빨려 들어갔다. 한국 교회가 성장한 토양에는 오순절 계통의 성령운동과 은사운동에 대해서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신학적인 기초가 부족한 목회자들이 주로 부흥회를 통해서 성도들의 신앙을 양육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마다 개최하는 부흥집회의 강사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했었는데 일부는 아주 극단적인 성령은사를 주장하였다. 이들 부흥강사의 특성을 잘 모르는 일반 성도들은 방언에 대해서, 예언과 병고침에 대해서 어떤 것이 진리인지 잘 몰라서 혼선을 빚게 되고 말았다. 여기에 몰려온 빈야드 운동의 여파는 실로 막대했으며, 잘못된 성령운동이 마구 확산되어 버린 것이다.
4. 빈야드 톰 스타이프 목사의 증언
미국에서 나온 빈야드 운동에 대한 가장 본격적인 비판서를 출간하여 큰 방향을 불러일으켰던 행크 해니그라프 목사는 원래 ‘갈보리 채플’ 소속의 평신도 출신 목회자로서 탁월한 변증가적인 안목을 가지고 분석하기를 잘한다. 그가 목격한 것을 근거로 <빈야드와 신사도의 가짜 부흥운동>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 서문은 덴바에 있는 크로스로드 교회(Crossroads church of Denver)의 담임목사인 톰 스타이프(Tom Stipe)가 썼다. 그는 원래 존 윔버의 빈야드 운동에 소속된 목사였다가 그 허상을 파악하고 성경적 교회로 돌아와서 다시 수천 명의 성도들을 회복하여 목회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행크 해너그라프의 증언들이야말로, 마틴 루터가 95개조문을 빗텐베르그 예배당 문에 걸어놓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5. 밥 존스의 성추문과 윔버와의 결별
1990년 가을, 밥 존스의 비윤리적 행동이 폭로되었다. 그가 범한 부도덕한 섹스 행위가 터져 나온 것이다. 이 때부터 밥 존스는 특별한 지도가 필요한 인물로 간주되었고, 캔사스 예언그룹에서는 탈락하게 되며, 단지 빈야드 운동의 일원으로 특별보호 속에 남게 된다. 그리고 그의 타락의 뉴스는 선지자들의 예언행위가 무너지는데 대못을 박는 것과 같았다.
1995년 존 윔버는 자신의 단체에 속한 자들에게 사과문을 발표하고 선지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운동이기에 결별을 선언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윔버는 마이크 비클고 헤어지고 난 후, 같은 해 12월에는 카나다 “토론토 에어포트 블레싱”에 대한 인정을 철회하고 또 다시 나뉘어진다.
제2부 고급 기독교가 무너뜨린 성경
Chapter 8. 자유주의 신학, 성경을 불신함
1. 고급 학자들의 전유물, 신학에의 반성
신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교훈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가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나타내 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을 통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다. 신학이란 학문은 인간이 주체가 되고 하나님이 객체로서 연구대상이 된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이 알려주신 한계에 머물러 있음을 인정하고 죄인됨을 고백해야 한다. 따라서 신학은 하나님이 주체이시고, 하나님이 인간을 거듭나게 중생시켜 주실 때에 가능한 학문이다. 신학자들의 책임은 성경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총괄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 특별계시를 풀어놓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모든 교훈, 즉,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다. 신학의 종합적인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가감없이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시며 능가하신다.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생각 전체를 꿰뚫어 알 수 없다. 신학은 하나님께 의존하고 진실하며 겸손한 마음을 소유해야만 가능하다.
2. 최고급 신학의 이탈
교회를 허물고 흐트러뜨린 대상은 고상한 학문을 닦은 ‘고급 기독교’의 전문가들이다. 특히, 독일 자유주의 신학과 영국의 포용주의자들이 남긴 피해가 고스란히 교회의 황폐화로 연결되었다. 전세계에 퍼져나간 18세기 유럽 자유주의 신학파 그 이류의 신학들,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인해서 성경의 신적 기원과 영감이 의심을 받게 되면서 무오하고 완전무결한 신앙의 기초가 흔들리게 되었다. 성경에서 떠난 교회들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식고 말았다. 변질된 신학은 아주 고급 지식인들의 사상을 망치고 말았으며 변질된 신학은 높은 차원의 교회침탈을 가져왔다. 현대 신학이 끼친 부정적인 영향은 교회 강단의 황폐화를 가져왔다. 성경을 불신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3. 자유주의 신학의 막강한 파괴력
교회의 중추를 이루던 유럽 지역에서 18세기 후반부터 약 150년 동안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통칭되는 새로운 신학이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대신학의 아버지, 쉴라이에르막허에서부터 칼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목회자들이 교회의 강단에서는 새로운 이론들과 변질된 메시지를 쏟아내었다. 특히, 교회안의 젊은이들은 서서히 그들의 메시지에 따라서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하나님을 의심하면서 멀어져 갔다. 자유주의는 18세기 유럽 계몽주의 사상에 기초새서 만들어진 것이다. 기독교는 성경에 기초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신앙적 교회가 지켜온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종결은 새로운 복음전도의 도전과 노력으로 조성된 교회의 갱신에 있다. 자유주의 신학은 그 토대가 유럽의 철학과 과학에 기초한 변질된 신학에서 출발했다. 이제는 사람의 이성과 합리적인 생각만을 의지하고자 하였다. 영적인 것, 초월적인 것,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역시 변질되고 말았다. 어찌하여 자유주의 신학이 그토록 큰 영향을 발휘하였던가? 19세기 유럽신학, 특히, 독일신학은 그 나라의 부강함을 통해서 널리 퍼뜨릴 힘이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이 번창한 “자유주의”라는 정체불명의 기독교는 학문적 권위로 포장되어 있었는데, 차츰 교회들은 이런 것을 분별하지 못한채 물들어갔고, 마침내 기독교 신앙은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최고의 학문성과 최신예 학설이라는 교만함에 빠지고 말았으며, 교회에 유익을 주는 신학에서 변질되어갔다. 세계 교회는 이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이론’과 ‘학설’을 무작정 믿고서 따라갔다. 신학논쟁이 많았으나, 독일학자들의 학문성으로 무장한 신진 교수들이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수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고, 젊은이들은 더 이상 성경 말씀을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게 되어 교회는 황폐하여져 갔다. 결국 독일 루터파 국가교회는 점차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4. 자유주의 신학에서 돌아선 카이퍼
19세기 말에 자유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난 후에, 목회자로 나간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가 목회 초년병 시절에 경험한 것이 이와 똑같은 것들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의 피해에 대한 그의 생생한 증언들이 남아있다. 그는 성경과 초자연적인 이적들을 믿었지만, 하이덴대학교에서 배운 신학을 가지고 현장에서 적용하려고 했었다. 카이퍼는 이들에게서 배운 신학이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그 전통을 이어받은 고마루스와 같은 신학자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카이퍼는 전통적인 교회에서 주일날 들었던 것과는 전혀 반대되는 것을 소위 근대주의라고 포장한 자들의 공격임을 간과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이들의 이론과 책은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새롭게 칼빈의 저술들을 통해서 개혁주의 전통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 카이커는, 어머니 교회에 대한 그들의 심리적인 확신을 새롭게 터득하게 되었다. 전통 개혁교회의 장점을 되살리지 못하고 있던 당대의 교회를 재인식하면서, 이제 그들이 가져왔던 ‘어머니 교회’의 열망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5. 인본주의 신학의 세속화 과정, 그 첫 단계
한국 교회가 독일 자유주의 신학자의 학문과 이론만을 따라가게 되면, 결국 망하고 만다. 출중한 두뇌의 소유자들이 만들어낸 학문적인 이론들과 지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학문에만 자긍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유럽교회처럼 잘못된 신학적 이론에 휩싸이게 되면, 그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의 믿음이 무너진다. 그 이론에 감염된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흔들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희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새로운 신학’이 끊임없이 기존의 신학을 버리도록 한다. 치명적인 살상용 독이 들어 있는 교리들과 이론들은 영혼을 망하게 한다.
6. 자유주의 신학의 정점, 릿츌과 벨하우젠
알브레흐트 릿출(Albrecht Ritschil, 1822~1889)에게서 자유주의 신학은 총체적으로 제 모습을 갖추어 나타난다. 그는 튀빙겐대학교에서 바우어의 제자로 수학했고 본대학교와 피팅겐대학교에서 가르쳤다. 모든 초월적이며 초자연적인 형이상학을 거부하였으며, 기독교의 윤리적, 사회적 책임에 강조를 두었다. 1952년부터 ‘조직신학’을 강의하면서 신앙이란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은 다른 어떤 경험으로 바꾸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릿출은 더 이상 기독교의 그 어떤 초월적인 영역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의 주관에 따른 기독교에 머물러 버렸다. 그가 중점을 두는 기독교의 가치들은 모두 다 가정이라는 틀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율리우스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 1844~1918)은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아나서, 피팅겐대학교에서 수학 후 훗날 교수가 되지만 성경을 비평하는 문서설이란 학문을 확장시키는 장본인이 되었다. 구약셩경의 처음 다섯 권에 대해서 의심하고 과학적으로 학문적으로 다시 점검해야 한다고 주장해따. 벨하우젠은 처음에는 이 문제로 양심적인 갈등을 가진 나머지 이를 고백하였다. 그래서 전통신학에 대한 학문적 거부감으로 인해서 처음 가르치던 대학교에서 물러났다.
7. 자유주의 신학의 권세, 하르낙과 쉬바이처
1907년 하르낙은 ‘사회복음’ 운동을 펼쳤다.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인간의 형재애를 강조하였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쉬바이처의 신학적 변형은 또 다른 형태의 권위를 보여준다. 쉬바이처는 의학, 신학, 음악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은 보기 드문 수재다. 자유주의 신학자 쉬바이처는 예수 그리스도의 연구자로서 당대 독일 신학의 흐름을 한걸음 더 혼란으로 몰고 갔다. 1906년 그가 「역사적 예수의 탐구」에서 주장한 이론은 18세기초로부터 시작된 예수에 대한 연구를 종합한 것이다. 예수의 이미지가 시대에 따라, 연구자에 따라서 달라지고 변화해 왔다는 점을 들면서, 앞선 세대의 연구 결과를 종합하여 자신의 해석을 제시했다. 즉, 예수의 생애는 그분 자신의 확신이라는 빛을 통해서 해석되어져야 하며, 그것은 후기 유대 종말론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8. 게르만 이데올로기, 불트만의 ‘비신화화’
신약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은 마브르고 대학교에서 평생을 가르치면서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기적과 초월적인 능력 등은 ‘비신화화’하여 제거할 것을 제청하였고, 신약성경에서 십자가의 죽음만이 순수한 기독교 신앙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양식비평“이란 해석방법을 제안하였고, 「신약성경과 신화」에서 예수님의 선재설을 거부하였다.
Chapter 9.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1. 성경과 계시를 완전히 격리시킴
바르트의 신학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것은 “성경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용될 때에 계시가 되어진다”고 하는 개념이다. 계시와 성경을 완전히 분리시킨다. 바르트가 성경과 하나님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경 자체가 말하는 계시를 그대로 허용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자신의 계시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성경을 대체한 것이다. 이것이 성경과 그 권위의 교리에 내포되어 있다.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을 따로 가지고 잇다. 신정통주의라고 알려진 그의 신학의 정체성은 ‘초절주의’ 혹은 ‘변증법적 사색주의’ 라고도 부르고 있다.
2. 기독론 중심주의
바르트 신학에서 또 다른 논쟁은 소위 ‘기독론 중심주의’ 라고 평가받는 그의 기독론과 구원론에서이다.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3중직, 즉,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3중직은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이라는 두 가지 상태에서 구원사역을 완성하였다. 바르트는 ‘종으로서의 주님’(Der Herr als Knecht)과 ‘주님으로서의 종’(Der Konecht als Herr_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더 강조한다. 연속적으로 구원사역을 감당하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화해를 보는 변증법적인 논증에 치중한다. 이중적 신분이 아니라, 화해의 두 측면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결국, 두 가지 본성과 두 가지 상태가 서로 긴밀히 연합되어져 있다는 주장은 ‘겸손’의 신분에서 ‘높아지신’ 상태로 변화되어지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변화와 전개를 거부하는 것이다.
3. 정통신학의 계승자 논쟁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세우고 지켜나가는데 있어서 바르트와 바르티안들은 매우 대립적이다. 칼빈에 대한 해석과 17세기 그의 계승자들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신정통주의의와 전통적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완전한 대립이 형성되어 있다. 정통 개혁주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17세기 청교도, 네델란드에서 발전된 개혁주의 교회들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한다.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는 범신론과 진화론이 위세를 떨치던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 속에서 가장 순수한 기독교의 원형으로 칼빈주의를 주장했고, 그의 강연과 자술들은 종교개혁의 신학을 다시 돋보이게 만들었다. 카이퍼와 함께 헤르만 바빙크도 개혁신학의 현대화된 체계를 수립하는데 ‘백과사전적인 종합‘ 으로 큰 공헌을 했다. 훗날 반틸박사는 네델란드의 카이퍼와 바빙크와 함께, 워필드박사를 3대 칼빈주의자라 평가하였다.
하지만, 칼 바르트의 영향을 입은 ‘바르티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새롭게 칼빈을 계승했다고 주장한다. 칼빈의 신학은 16세기의 성경적인 휴머니즘에서 출발하여, 당신의 사회와 문과, 정치와 경제, 교회 제도와 성례 등에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비해서, 바르트는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을 구성하고자 했다. 따라서 바르트는 칼빈 신학도 역시 그리스도 중심적이라고 해석하였다. 또한 ‘기독론 중심’의 바르트 신학은 모든 신학의 중심주제로 환원되고 말았다. 바르트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은 그의 인식에 따라서 기독론을 강조하였다.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들이 칼 바르트의 지도하에 방대한 분야에서 기독론 중심의 이론을 폈다.
4. 한국 교회를 위한 김중은 총장의 충고
김총장은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신학노선”에 관하여 “최근 신정통주의가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신앙의 중심이나 ‘신학노선’이었던 적은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상 단 한번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김총장은“‘목회자나 교수 개인에 따라 신정통주의나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띄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정확한 신학노선은 개혁주의 입장에 선 복음주의”라고 단언했다
Chapter 10. 영성신학의 실상과 허상
오늘날 ‘종교’, 즉 ‘신앙’은 사라지고 ‘영성’으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데 더욱 걱정이 된다. 오랫동안 ‘기독교 종교’라는 말이 중대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오늘의 영성은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이도 가능하다. 즉. ‘교회’는 거부하더라도, ‘신앙’이 가능하다는 주장과 마찬가지다. ‘기독교 종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희망의 선언이라는 표현만으로도 종교의 영역을 대체할 수 있다고 본다.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나, 예배나, 헌신이나, 선교 등은 제쳐놓고, 영적인 감정주의에 빠져버리는 종교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성을 강조하게 하는 자들에게 묻고 싶다. 그러면, 육체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성이 중요하고, 육체성은 따로 다루어야 하는가, 육체성 이 영상에게 복종하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인가? 영지주의자들처럼, 혹은 플라톤의 이원론처럼 영성주의자들의 위험성은 항상 남아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 신앙과 생활의 영원한 진리가 되는 성경에 의존하여 세워졌고, 구체적인 역사 현장에서 나왔으며, 각가의 문화와 사회 속에 복음의 씨를 뿌리는 과정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다듬어지고 훈련된 것이다. 그런데 영성은 과연 어디에서 눈구에게 얻은 씨를 뿌리고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공동체를 건설하는 제자화 훈련의 전과정이 아니라면, 특수한 사람들의 고급스러운 자기 과업에 불과한 것이다.
Chapter 11. 말씀과 교회는 무너지지 않는다!
1.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양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다. 어린 양들의 목자되신 예수님이 그들을 보호하사, 울타리 밖에서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탄 마귀로부터 지켜주시고 보호하신다. 결코 교회를 흔들자가 없다. 이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 무너진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를 택하사 자기 몸을 주신 예수님은 결코 잊지 아니하시고, 주무시지 아니하시고, 졸지도 아니하시며,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신다. 빛을 드러내는 대행기관으로 교회를 세우셨다.
그러나 분명히 현실 교회, 특히, 한국 교회와 해외 한인교회들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리고 안팎에서 도전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직면하는 현재 한국 교회의 악취와 부패 속에서도, 아니 지난 2천년 동안에 드러난 온갖 부정과 타락 속에서도 교회는 없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지키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교회의 승리란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절대로 사탄이 이기지 못하는 교회가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교회에 부여해 주신 가치가, 교회를 통해서 깨닫게 해 주시는 축복이 있다는 뜻이다. 참된 진리, 진실한 것, 참된 것과 선한 것을 오직 교회라는 공동체에게만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어떤 기준을 삼아 교회생활을 하지 않기 바란다. 자만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자로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것인 바, “신의 성품”이다.
2. 박해와 고난 속에서 승리한 교회
기독교 교회는 로마 제국의 황재숭배주의자들에 의해서 거의 2백년 넘는 긴 세월 동안에 혹독한 시련을 당했고, 10대 박해자들의 서슬아래 치하에 숨어서 보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비밀리에 물고기 모양으로 표시를 하면서 지하 무덤, 카타콤에서 고난을 당하는 눈물겨운 이야기들을 어찌 다 필설로 녹여낼 수 있으랴.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교회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만은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성경에서 교회에 대한 사명을 새롭게 발견한 사람들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었다. 이들은 진주와 같은 보화들을 성경에서 발견하였다. 전통과 구습에 찌든 중세말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잔해 속에서 복음을 찾은 것이다. 쯔빙글리, 요한 칼빈, 마틴 루터 등이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기차를 드높게 세웠다. 오직 성경만을 설교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얻는 구원의 도리를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교회는 다시 빛을 발휘하게 되었다.
3. 능력으로 역사하여 교회를 세우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보내신 우리 구주 예수님이 세상에 세우신 교회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구원의 방주’로서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며, 귀신들린 자들에게 회복을 가져왔다. 교회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서 역동성 있게 생명을 공급하는 공동체로서 유지되어 왔다. 복음은 사람을 살려내는 능력이 있다. 뿐만 아니라 장차 하늘 나라의 권능을 이 땅세서 받게 하시며, 맛보게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은 가난한 자, 눈먼 자, 포로된 자,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함을 주시는 것이고, 이는 그의 부활로 이루어지고 퍼져나갔다. 사도들이 죽고난 이후에도, 예수님의 능력과 권능은 그대로 초대교회 성도들 사이에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살아남아 영혼을 살렸다.
4. 불쌍한 인생, 불행한 사람들을 위하여
왜 교회를 통해서 믿음을 키우고, 사랑을 나누며, 희망의 미래를 꿈꾸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교회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진리를 전해주는 기관이다. 아무에게나 나눠주는 복음이지만, 값싼 물건처럼 함부로 마구잡이 ‘세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고귀하고 값비싼 보배, 보화를 주시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주신 용서와 평안이 있을 뿐이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와 도우심, 그리고 그의 능력과 진리가 우리에게 주시는 영광이다.
5. 교회의 미래를 향한 꿈을 꾸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한국 교회를 세우시고, 여러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은혜를 입고 성장하게 해 주셨다. 지난 30년은 한국 교회의 한 세대를 새롭게 장식하고 준비하신 새로운 세대가 되는 것이다. 세계선교와 통일 한국의 세대를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미래의 축복을 향해 준비하시는 세대로 사용하셨다. 그리고 우리들 가운데 남은 자들은 다음 세대에도 여전히 사용하시리라 믿는다. 우리 믿음의 동지들이 함께 지내온 지난 30년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난 30년간 첫 세대를 사용하신 하나님께서 다음 세대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은혜를 주신 것이라 믿고 감사드린다.
1) “각성의 사명”을 다하자
왜 조나단 에드워즈의 회개와 열정적인 설교를 “대각성 운동”이라고 연결시키는가? 그 이유는 각성을 불러일으켜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점전 세속주의적인 즐거움과 일상에 물들어가던 젊은이들을 깨우고, 저녁이면 술집으로 모이던 시골 농부들을 흔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관심과 죄악을 회개하면서 은혜를 체험했고, 여성들은 말씀을 읽기 위해서 글을 깨우치며, 받은 은혜와 회개의 제목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감동적인 교제와 사랑을 나누었다. 한국 교회, 특히 보수적인 장로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풀어내는 것도 역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일어나는 회개와 반성이 수반된 ;대각성‘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사람의 노력이나 열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과 성령의 부흥케 하시는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기독교 신앙은 지속적인 갱신과 역동성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유지되고 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기독교 신앙인들의 길은 좁은 길이요, 좁은 문을 향해 가는 길이다. 특히, 오직 성경을 의존했던 종교개혁자들이 남긴 개혁주의 신앙의 본질은 ’지속적인 갱신‘이었다. 한국 장로교회가 선교 백주년을 맞이하던 시기, 지금부터 정확히 30년전에 부르짖었던 바램들을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다시한번 지속적인 갱신에의 요구들을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할 때이다. 단순히 교회 정치에 대한 혐오와 거부와 배척이 아니라, 모든 예배와 교회 제도, 교회 정치만이 아니라 성도들의 경건한 생활과 언행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노력을 계속해 나가도록 해야 할 때이다.
2) 다시 새로운 분위기가 필요하다.
교회에 모이면 뜨거운 심장과 박동하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예배의 전체 진행이나, 찬송을 부르는 태도와 자세,, 기도에 임하는 엄숙함과 진지함, 감동적인 설교, 깊은 성도의 만남과 사귐 등등 새로운 분위기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의 심장에 불타던 역동성이 디오에게 전달되었고, 지금 우리에게도 부어져야 할 때이다. 현재 한국 장로교회는 새로운 분위기가 필요하다. 과거를 부정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과 눈물을 통해서 교회의 역할과 사명을 재정립해야 한다. 개교회주의라는 세속화에 감염되어서 무감각해진 존재감을 빨리 털어버리고 일어나야 한다. 장로교회의 역사적 정통성과 긍지를 회복하고, 신학적 역동성과 자존심을 회복해서 어려운 현실 속에서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여야 할 때이다.
3) 역사적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자
우리 장로교회가 고백하는 신앙의 핵심 조항들은 성경을 믿고 살아갔던 선진들의 역사적 체험 속에서 형성되어온 것이다. 분명한 신앙고백을 다짐하는 교회들은 시대마다 공헌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살아있다. 신앙고백은 견고한 성경적 안목을 주며, 자신감과 영적인 지도력을 겸비하게 한다. 신학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면, 뛰어난 리더쉽을 발휘할 수 있다. 일반 성도들은 장로 교회의 신앙적인 정통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에, 감각적이고 현대화된 예배에 미혹되어 버리고 있어서, 과연 장로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자괴감이 깊어지고 있다. 이제라도 분명한 개혁주의 신앙을 견고히하고, 말씀 중심의 기초에 견고히 서야할 때이다.
4) 교회론의 변질을 경계하자
사회복음의 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 정치신학, 과정신학, 한국의 민중신학 등 여러 현대 신학자들의 주장이 나올 때마다, 가장 먼저 비판받고 소홀히 취급한 것이 교회였다. 이런 신학들은 교회의 소중함을 과소 평가했고, 건전하게 성경적인 균형을 유지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예배를 소홀히 하여 생명력을 상실했다. 교회 안팍의 문제를 함께 균형있게 다루기 보다는 교회 밖에서의 문제를 붙잡고 해결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결과적으로 교회를 과소평가하는 가운데, 성경적 교회혼의 변질이 초래되고 말았다. 또 다른 교회론의 혼란은 과연 교회에서 성도들이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르고 말았던데서 초래되었다. 교회론의 혼란은 일부 은사주의자들의 열광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자신만이 간직하는 아주 신비롭고도 개인적인 영적 체험을 강조하는 부흥운동은 건전한 부흥신학의 토대가 없이 교회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신학적 관용주의는 결국 사이버와 같은 변질된 신앙도 용납하게 되고 말았고, 성도들이 참된 성경적 교회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가운데 교회론의 중대한 변질이 초래되고 말았다.
5) 영혼에 꿈을 불어넣자
이제 우리는 교회의 권위가 상실되고, 사람들은 쉽게 교회를 옮기는 세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제 젊은 세대는 교회에 충성하기 보다는 이익을 얻으려 한다. 성도들의 교회관에도 갱신이 필요하다. 교회는 이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좋은 환경과 시설을 선호하고, 넓은 주차장을 원한다. 더구나 미국식, 혹은 자본주의적인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 세속적이며, 현대적인 가치관은 돈과 성공이다. 그런데 교회성장학은 교회 안에서도 역시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의 내용이나 다를바 없다. 교회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과 가르침은 무엇인가? 교회는 영원한 진리가 이 땅위에 진입해서 준재하고 있는 곳이며,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이다. 교회는 그저 머물러 있는 고인 물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대행기관이지만, 하나님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곳은 아니다. 죄에 물든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우리가 살아야 할 바른 길을 제시하되,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제대로 된 방법을 쉽게 정확히 알려달라는 것이다. 어렵게 모르는 내용으로 말하지 말고 쉽게 구체적으로 할 수 있게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우리들 목회자들이 이 시대에 마지막까지 감당해야할 사명은 꿈과 용기를 영혼에 불어넣는 일이다. 복음의 능력, 곧 꿈과 미래를 가진 사람들이 느끼는 강력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명감, 그리고 열정과 불타는 의지, 바로 이것이 한국 교회의 정체된 현상과 침체를 새롭게 하시는 원천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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