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에게 나타나신 여호와
창세기28:10-15
drama나 영화의 내용 중에 재벌의 아들들이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어려움을 당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회사의 최고 owner가 자식에게 일부러 고생을 시키는 것입니다. 후에 거대한 회사를 경영하려면 고생도 해야 하기 때문에 낮은 직책에서부터 차근차근 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직책이 낮다고 해서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왕자의 수업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그 사람은 이미 약속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왕자를 함부로 할 수가 있습니까? 영의정이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정승들이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왕자를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왕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후에 왕될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곱은 축복을 받기 위해서 여러 가지 사건을 겪었습니다. 형에게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샀습니다. 에서를 제치고, 에서대신 이삭에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두 눈을 멀뚱하게 뜨고서 거짓말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삭에게 하늘의 축복을 따냈습니다. 그의 길은 이제 탄탄대로에 올라야 했습니다. 에서는 쇠해지며 야곱은 번성해야 했습니다. 에서는 바로 약해지며, 야곱은 강해져야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에서는 아버지 집에 있고, 야곱은 도망자신세였습니다. 명분이야 혼인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도망자였습니다. 10절에서 11절을 보면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I. 하란으로 도피하는 야곱(10-11)
사람과 사람과의 약속은 지키기가 참 어렵습니다. 약속을 100%지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들의 환경과 여건이 그렇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지키십니다. 몇 천 년 전에 하신 약속이건, 몇 백 년 전에 하신 약속이건, 그대로 지키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쓰시고자 하실 때는 시험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입증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충분히 부응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입증하시고자 고난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120년이나 지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삭은 가나안땅을 벗어나지 않아야 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서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따라서 야곱역시 에서를 피해서 도망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하란신학교에 입학하러 가는 것인데, 에서나 불신자들 편에서 보면 인과응보 같습니다. 하란에 가서 철저한 교수 밑에서 무려 20여년을 공부해야 하는 야곱의 여정이었습니다.
야곱이 고향인 브엘세바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하란을 향해서 갔습니다.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의 거리는 약650km입니다. 어떤 사람은 800km라고 했습니다. 650km이건, 800km이건 간에 가까운 거리는 아닙니다. 먼 거리입니다. 가는 중에 한 곳에 이르렀습니다. 집에서 떠난 날에 처음 이곳에 당도한 것이 아니고 여러 날이 지나서 한곳에 이른 것입니다. 이미 해가 져서 먹고 자야 했습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돌 하나를 찾아서 베개를 삼았습니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먼 도피길에서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지치고 지쳐서 피곤한 잠자리였을 것입니다. 거의 한 번도 장막을 떠나서 자본적이 없었습니다. 갑자기 경망 중에 떠난 것이라 가재도구도 챙기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처량한 신세였습니다.
Calvin은 야곱의 이 행로를 보고 여호와께서 어떻게 교회를 보존하셨는가를 관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일개 개인의 몸 안에 자기교회를 보존하셨다고 주석했습니다(존‧칼빈성경주석출판위원회 1995. 163). 우리가인식하여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안에 교회를 보존하셨습니다. 다음에 이삭 안에 교회를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삭에게는 더 이상의 소망이 없었습니다. 에서는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늘의 소망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이삭으로부터 그 복이 제거되었습니다.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보기에 소망이 없이 보였던 야곱 안에 교회를 보존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큰 것을 선호합니다. 유명한 것을 선호합니다. 그리고 인지도가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것은 Christian도 예외는 아닙니다. 크고 웅장한 것을 좋아합니다. 유명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번듯한 교회를 좋아하지, 자그마한 교회는 선호하지 않습니다. 외형이 훌륭한 것을 좋아하지, 내면은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곱의 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합니다. 영화로운 일, 좋은 일은 지금까지 에서에게 주어졌습니다. 에서는 남아서 이삭의 모든 것을 소유했습니다. 안전하게 거했으며, 이삭의 재산을 모두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어떠한 상황입니까? 하란에 도착하기까지 노숙을 해야 했습니다. 지치고 곤한데도 바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두려워해야 했습니다. 차디찬 바닥에서 차디찬 돌을 베고 찬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장막에서 편안하게 보낸 에서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장막삼고 불편하게 잠을 자고 있는 야곱에게 있었습니다. 야곱에게 전교회의 소망이 있었고, 그를 통해서 영원한 세상을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의 Artemis/Diana 신전은 세계7대 불가사의중 하나입니다. 아데미 신전은 처녀와 정절, 다산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아르테미스를 섬기기 위해 에페수스 사람들이 범국민적으로 건설한 신전입니다. 주전6세기 중엽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 때부터 세우기 시작하여 120년이 걸려 완성되었습니다. 신전은 높이20m 정도로 백색의 대리석을 깎아, 127개의 기둥을 이오니아식으로 세우고 지붕을 이어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이 세워지고 난 후, 그리스의 역사가 Herodotos가 이곳을 본 후, 이집트의 피라미드, 모에리스에 있는 라비린토스 등 세계적인 걸작에 전혀 손색이 없는, 위대한 걸작으로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전356년 10월, 헤로스트라투스라는 자가 후세에까지도 유명해질 수 있는 일을 찾다가 고의적으로 이 신전에 불을 질렀습니다. 신전이 불타버리자 디나크라테스는 재건에 바로 착수했는데 이때 에페수스에 살고 있는 여인들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석 등의 귀금속을 팔았고, 각지의 왕들은 기둥을 기증하였습니다. 아시아로 원정을 떠나던 알렉산더 대왕은 완성 중이던 이 신전에 마음이 빼앗겨 자기의 이름으로 이 신전을 세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비용을 대겠다고 했지만, 이방의 신전을 에베소에 세울 수는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에페수스인들은 아르테미스신전 복구사업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삼았습니다. 그 당시 가장 훌륭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2배 더 크게 짓고자 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이 높이 10미터 대리석 기둥을 58개 사용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높이 18미터짜리 기둥을 127개 사용하였고, 길이나 폭도 파르테논 신전의 두 배 정도로 만들었습니다. 건축 자재는 가장 순도가 높은 백색 대리석만을 사용했으며 대리석 계단을 사방으로 내서 중앙의 홀로 올라가게 만들었습니다. 이 신전이 기원전 250년경에 완성되자, 곧바로 전 세계에 그 규모와 화려함이 알려졌습니다.
당대에 로마사람들은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외형적으로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속주인 유대를 구원하지 못한 신을 그들은 별로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은 내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약속에 불을 붙여야 합니다. 그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야곱은 그 약속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불편하게 잠을 자고, 불편한 걸음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그를 감쌌습니다. 당시에 하나님께서는 야곱 말고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야곱 말고 누구도 약속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야곱 말고 누구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비록 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의 언약만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만 간직하면 기필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때 믿음으로 하지, 어떤 자격으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갈 때 믿음으로 살아가지, 어떤 다른 것으로는 살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을 귀하게 여기고 작은 믿음을 성장시키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을 성장시켜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찬 공기를 마시며, 돌베개를 하고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잠자리가 불편해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다가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12절에서 15절을 보면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II. 야곱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12-15)
계시라는 말을 사람들은 신비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새도 하나님께서 직통계시를 주셨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 그것을 믿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주로 이러한 것들은 시중에서 돌아다니는 말들입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직통계시를 주셨다면 성경은 미완성의 성경입니다. 이 사람의 직통계시와, 저 사람의 직통계시를 전 세계 교회회의에 붙여서 성경에 계속 붙여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시중에 돌아다니는 계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시라는 말을 ajpokavluyi"/apokâlluipsis/‘아포칼륍시스’라고 하는데, 숨겼던 것을 열어보이는 것입니다. 계시라는 것은 ‘덮개를 벗기는 것’ 또는‘이전에 감추인 것을 나타내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성경은 ‘우주’밖에서 ‘우주를 초월하는 곳’에서 왔습니다. 성경은 다른 세계로부터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1:1-2절을 보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여러 시대에 여러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말씀(rb'D;/dhābar/다바르/창8:15,12:4, 출9:13,35,11:2 등)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글로(출31:18), 어떤 사람에게는 꿈(!/lj}/hăllōm/할롬/출28:12)으로, 또한 어떤 사람들에게는 환상과 이상(@/zj;/hāzōn/하존/미3:6, 겔12:24,27,13:16 단1:17,8:2,15,9:21,24, 시8:20)으로, 자신을 사람들에게 계시하셨습니다. 따라서 구약시대, 즉 성경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꿈과 환상, 직접적인 말씀으로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성경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야곱이 꿈에 보니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하늘 꼭대기까지 닿았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그 사닥다리에서 올라갔다 내려왔다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홀로 있는 야곱,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야곱, 불쌍한 야곱에게 보상하시고자 나타나신 것입니다. 야곱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은 사닥다리위에 계신 분이었습니다. 야곱에게 사닥다리를 보여주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며 그 꼭대기에 계신 것을 보여주심은 교제를 나타내시고자함이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땅위에 있는 그의 백성사이의 끊임없는 교통( communication)을 야곱에게 나타내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왜 천사들이 등장했습니까? 물론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는 항상 천사들이 대동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천사들의 등장은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하나님께 가져가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를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가장 약할 때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이 가장 무기력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그곳, 밤새 뒤척이며 두려워하던 곳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닥다리가 서있었습니다. 그 꼭대기에는 여호와께서 지상의 누구보다 야곱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십니다. ‘나는 여호와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많은 뜻이 있지만 ‘하나님의 독자성과 언약적 주권’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Geerhardus Vos). 즉 너의 조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지켰고, 이삭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주권을 나타내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누워있는 땅을 내가(여호와),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 자손이 땅의 먼지(rp;[;/ʽāpār/티끌)같이 되어서 지구상에 가득할 것이라 했습니다(동서남북). 네가 초라하게 이렇게 누워있지만, 내가 모든 족속으로 하여금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너무나 약하고 부족하다고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 불평불만을 합니다. 자학합니다.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고 원망도 합니다. 그런데 약한 우리들에게, 부족한 우리들에게, 힘없는 우리들에게, 경쟁에서 밀리고, 자격이 없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 살아보니까 모든 것이 우리들의 뜻대로만 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잘못하기도 합니다. 실수하기도 합니다. 알고 실수하고 모르고 실수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실수를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진도가 더딥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야곱은 이삭에게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에서에게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자의반, 타의반 이삭과 에서를 속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는 야곱의 잘못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야곱에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창세기13:14-17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삭에게 하신 약속/창세기26:2-5 2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3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야곱에게 하신 약속/창세기13:13-15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순종의 사람 이삭에게 내린 복을 그대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을 거쳐서 야곱에게 복된 언약을 반복하셨습니다. 지금 추워서 벌벌 떨고, 두려움에 떨고, 쫓김에 떨면서 겨우 잠이 든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사상최대의 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곱만이 언약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야곱만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후계자라는 것입니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에게 주고, 네 자손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네 자손이 지구상에 가득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땅을 주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손의 번성, 그리고 너를 인하여 모든 족속(온 세상사람)이 복을 받을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M;%[i ykinOa;/ānōkî ʽimhākĕ/아노키 이마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yTi~r]m'v]W/ūshmērthîkā/우쉬메르티카),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며, 내가 네 일을 이루기까지 떠나지 아니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들은 어쩌면 야곱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성도라는 정체성을 잊을 만큼, 어려움에 시달리고, 고난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사람으로서 언제어디서나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어디에 있든지 지키시며, 우리를 항상 이끄시며, 우리의 일들이 끝나기까지 떠나지 아니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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