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강
재세례파
들어가는말
소위 ‘재세례파’는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그들의 주장은 무엇이었으며, 교회사적으로 볼때 그들은 성공자인가 실패자인가? 칼빈은 재세례파를 어떻게 평가했는가? 우리는 본 소고에서 이러한 질문들을 중심으로 재세례파의 기원과 성격을 다루고자 한다. 사실상 이 주제는 매우 광범위하며, 재세례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60년대 이후에 이루어져 왔다. 이 분야의 유일한 표준적 저작은 윌리암스(G.H. Williams)의 대작이다(The Radical Reformation). 하버드 대학교의 교회사 교수인 윌리암스는 1962년에 924페이지의 이 저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칼빈과 재세례파에 관한 연구도 있는데, 그것은 1973년 암스텔담에서 출간된후 1981년에 헤이넨(W. Heynen)에 의해 영역된 발케(Willem Balke)의 저서(Calvin and the Anabaptist Radicals)이다. 본래 이 책은 저자의 박사학위(Ph.D.) 논문이었다. 이 분야의 연구로는 매우 탁월한 저작이다.
국내에서 출간된 책으로는 윌리암 에스텝의 저서가 있다(요단출판사에 의해 <재침례 교도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1985년)
1. 재세례파의 기원과 분류
재세례파는 종교개혁 시기 중 교회를 갱신하기 위해서 가장 급진적인 시도를 하였다. 그들은 하나의 조직체가 아니라 엉성한 운동단체였다. 그들은 모두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신앙고백을 하는 성인에게만 세례를 주었다. <재세례파>라는 호칭은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러한 호칭을 거절했다. 이것은 그들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붙여준 비난의 명칭이었다.(교회사 핸드북 참고).
<웨스트민스터 교회사 사전>에 의하면 재세례파는 프로테스탄트가 수행한 것보다 더 급진적딘 개혁(More Radical Reform)을 원한 집단이다. 윌리암스(G. H. Wiliams)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급진파 종교개혁은 1520년 루터의 3대 종교개혁 논문이 나온 이후 60년 동안 기독교계의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던 놀라운 운동이었다“(p.846).
그에 의하면 급진파 종교개혁은 종교개혁과 반동 종교개혁처럼 그 실체가 분명하게 인정되어야 하는 운동이다. 그리고 재세례파는 교회의 개혁보다 교회의 회복(Restitution)에 일차적 관심을 가졌다(p.857). 그에 의하면 대부분의 경우 급진 개혁자들은 평화주의자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예정론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의 신학적 독점을 피했다. 물론 급진 종교개혁은 실패로 끝난 시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신념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피를 흘리는 불굴의 용기를 보여 주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신앙의 자유개념을 확신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이것은 교회사적으로 볼때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 점이다.
발케는 급진적 재세례파를 일곱 진단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 토마스 뮌쩌와 쯔빅카우의 예언자들
이 예언자들은 1521년 비텐베르크에 나타났다. 뮌쩌는 농민반란에 대해 동정적이었다. 그는 내적인 빛(Inner Light)에 관한 가르침을 옹호하였고, 분리된 교회를 변호하였다.
(2) 스위스 형제단
쮸리히의 쯔빙글리의 추종자들 가운데서 조직되었으며, 그들은 1525년 교회원의 자격으로서 성인신자의 세례를 주장하였다. 그들의 이상은 사도시대의 교회였다. 그들은 거룩한 회중을 형성함으로써 그 시대의 교회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그들은 전쟁을 반대했으며, 그리스도인이 공직을 갖는 것도 반대하였다.
(3) 모라비아 공동체(후터파, Hutterites)
후터(Jacob Hutter)의 지도아래 이 집단들은 공동소유의 기초위에서 공동체를 세웠다. 그들은 행정관리의 권위를 거절하였고 전쟁비용에 쓰이는 세금의 납부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종교적 권징을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4) 멜키오르파(The Melchiorites)
이들은 멜키오르 호프만(c. 1496-1644)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은 재세례파이다. 그는 기독론에 있어서 가현설을 주장했고(가현설이란 그리스도께서 단지 인간의 환영만을 가졌다고 가르치는 이단 교리임. docetism). 임박한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를 고무시켰다. 그는 여호와의 날이 어느 순간이라도 임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5) 뮌스터 재세례파
죤 마티스에 의해서 후에는 죤 뷰켈스(John Beukels)에 의해서 인도된 그들은 1533년부터 1535년 사이에 뮌스터에서 성별된 사람들의 왕국을 세우려고 시도했다. 이 재세례파 왕국에서는 소유를 공동의 것으로 했으며, 심지어 일부다처제가 시행되기도 했다. 이들의 지나친 행동과 광신적 열광주의 때문에 ‘종교개혁의 좌파’ 전체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또한 이 때문에 그의 반대자들에게 심한 핍박의 구실을 주기도 했다.
(6) 메노파(The Mennonites)
뮌스터 사건이후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 주변에 모인 평화적인 재세례파들이 있었다. 메노 시몬스는 네델란드의 재세례파 지도자였다. 그는 초기에 로마교회의 사제로 평범한 생활을 하다가 뮌스터 폭동을 계기로 재세례를 주장하였고, 절대평화주의에 입각한 재세례파 재건에 진력했다. 그는 1555년 이후에 저술활동에 전념하였다.
메노파는 교리적으로 스위스 형제파와 유사하여 신앙인의 세례 및 개체교회의 책임과 권리를 강조하며 교인의 세속 권력 참여를 반대한다. 17-18세기에 이르러 메노파는 네델란드 안에서 영향력이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1980년 현재 전세계 메노파 교인은 63만3천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메노파는 유아세례와 성만찬의 화체설을 부정하고 있으며, 설교는 남녀 누구나 할수 있다. 메노파는 국가의 군대징집도 거부한다.
메노는 기독론에 있어서 멜키오르 호프만의 견해에 가깝다.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메노는 재세례파 운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7) 데이빗 조리스(David Joris)집단
이 사람은 본래 델프트(Delft)에서 착색 유리 제조업자로 일했다. 그가 재세례파에 가담했을때 그는 장로(Ruling Elder)의 직분을 부여받았다. 그는 환상적인 영적 체험을 했으며, 이로 인해서 자신이 메시야라는 망상에 빠졌다. 바젤에서 그는 추종자들의 후원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가명으로 지냈다. 그는 자신이 내적으로 그 길(the way)를 알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메노 시몬스는 그가 적그리스도이며, 그의 추종자들은 ‘거짓 형제들’이라고 생각했다.
이 다양한 재세례파가 어떻게 발전했으며 상호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의견의 불일치가 있어왔다(W. Balke, p.4.) 왈터 쾰러는 재세례파 운동이 종교개혁으로부터 유래될 것이라도 주장했다. 혹자는 중세기 이단의 부흥으로 보기도 했다. 또는 이 운동의 출생지를 독일의 농민반란의 신학적 지도자인 토마스 뮌쩌와 관련시켜 독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혹자는 콘라드 그레벨과 그의 추종자와 관련하여 그 기원지를 쮸리히로 본다. 심지어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Humanism)의 논리적 결과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트뢸취(E. Troeltsch)와 브랑케(F. Blanke)는 재세례파의 요람이 쮸리히라고 주장했다. 모든 재세례파는 쯔빙글리의 설교(가르침)를 과격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2. 재세례파의 성격
싱어(G. Singer)는 <베이커 신학사전>에서 말하기를 “재세례파 운동은 성격상 종교적이지만 시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급진주의와 함께 연합하였다“라고 했다. 재세례파는 하나의 일관성있는 단체는 아니었으며 여러가지 상이한 종류가 등장하였다. 그 범위는 온건한 집단으로부터 급진적 집단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였다.
그들 모두는 한결같이 성인 신자의 세례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유아세례의 무효화). 그들은 인간의 전적부패, 원죄, 선택, 영원한 저주 등과 같은 교리를 부정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어서 하나님과 직접적이고도 신비적인 연합을 할 수 있다.
이만열 교수는 재세례파에 관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재세례파운동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그들이 지닌 사상과 운동의 성격을 설명하기란 용이하지 않다.” 이 교수는 이 운동의 세가지 공통적 요소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1) 유아세례를 반대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그 신앙을 고백하는 자에게만 세례를 줄수 있다는 것이다.
(2) 국가와 교회의 절대적 분리를 주장한다. 그러므로 <국가교회>는 그들이 배격하는 대상이었다.
(3) 이상적 교회의 표준을 초대교회에서 찾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복고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에 대한 재세례파의 신념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그들은 교회의 단순한 개혁에 관심이 없었고 활기차고 신앙이 훌륭한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두었다. 성경을 통해서 그들은 교회가 형제애의 단체(즉, 믿음의 가족)라는 것을 알았다.
교리문제를 결정할 경우, 그들은 지역 회중의 일치에 의해서 성경을 해석하고자 했다. 교회의 권징문제에 있어서는 신자들이 서로 협력하는 자세로 행동해야 했다. 그들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진실로 따른 자들은 순례자들이었으며 그리스도의 교회는 영구적인 나그네들으 모임이었다.
3. 칼빈과 재세례파
재세례파 연구 문헌과 칼빈 연구 문헌을 살펴보면 양자간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거의 전무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재세례파 진영의 학자뿐만 아니라 칼빈주의 계열의 학자들도 칼빈과 재세례파의 관계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지 않았다.
린데붐(J. Lindeboom)은 그의 저서에서 급진파에 대한 칼빈의 관련을 다루고 있으나 재세례파는 빠져있다. 쾰러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타나난 언급을 연구했다(1937년). 힐데브란트는 지적하기를 개혁자들의 논쟁적 글들이 재세례파 신학의 이해를 위한 부가적 자료로서 연구되어야 한다고 했다(Balke, p.9).
그러면 칼빈에게 있어서 재세례파와의 접촉은 언제 이루어졌는가? 회심 이전의 칼빈은 두 세계의 경계선상에 위치하고 있었다. 즉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이 그것이다. 칼빈은 종교개혁 신앙을 받아들인 후(1533년 경) 처음으로 쓴 신학적 논문(Psychopannychia)에서 재세례파를 처음으로 공격했다. 이 문서에서 칼빈은 중간상태와 관련한 영혼수면설(The Doctrine of the Sleep of the Soul)을 반대하였다. 일부 재세례파 사람들이 이교리(Psychopannychy)를 받아들였으나 칼빈은 이를 거부했다(오늘날에는 안식교가 이 교리를 채택하고 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1536)에서 프랑스의 개혁파 신자들이 재세례파로 오해되고 있는 점에 대해 밝히기도 했다. 또한 칼빈은 시편 주석 <서문>에서 말하기를, 재세례파와 선동적인 사람들이 그들의 외고집의 광란과 거짓된 생각에 의해 종교뿐만 아니라 모든 공공질서를 전복시키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칼빈은 재세례파의 교회관에 반대하여 교회가 이 세상에서 전적으로 거룩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그들의 주관주의에 반대하여 예정을 강조하였다. 칼빈은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재세례파에 반대하여 유아세례의 성경적.신학적 정당성을 변호하였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가 교황주의(Papalism)에 의해 만들어진 전통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칼빈은 유아세례가 교황이나 어떤 인간적 기관에 의해 고안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Balke, pp.217-218).
권징 문제에 있어서 칼빈은 원칙적으로 권징의 필요성에 관한 재세례파의 견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순결한’ 교회에 대한 재세례파의 견해가 기본적 문제점이라고 확신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신자는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하여 매일 매일 선행을 실천하면서 전진해야 한다.(Against Anabaptists. pp.66ff).
칼빈은 우리가 우리 마음에 들지않는 어떤 것을 발견하자 마자 곧 신자들과의 교제를 끊어버리는 태도를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당시에 재세례파는 파문(출교)을 실시하지 않는 교회를 떠나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칼빈은 지나치게 엄격한 그들의 태도를 거절하였다.
맺는말
칼빈과 재세례파는 공통적으로 삶의 성화, 권징, 교회의 자유를 강조하였다. 칼빈은 칭의와 연결하여 성화를 이해하였고 재세례파의 완전주의를 거절했다. 뮌스터의 재세례파로 인해 재세례파 전체가 오명을 쓰게 되었으나, 분명히 말할수 있는 것은 진지한 삶의 자세,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사랑 그리고 성경 존중의 태도가 칼빈과 재세례파 모두에게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재세례파는 그리스도의 증거와 순교의 가장 영광스러운 역사중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사람들이었다“(F.H. Litt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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