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스크랩] 침례교회의 기원과 관련한 아나뱁티스트 영혈설에 대한 비평적 고찰(김승진)

INJESUS 2012. 4. 24. 17:37

침례교회의 기원과 관련한 아나뱁티스트 영혈설에 대한 비평적 고찰
김 승 진(침신대 교수)


I. 서언

침례교회가 언제부터 어떤 연유에서 기원하였는가에 관하여 3-4 가지 학설이 주장되어 왔다. 미국의 북침례교의 대표적인 역사신학자인 Robert G. Torbet은 그의 저서 A History of the Baptists에서 전승설(The Successionist Theory), 아나뱁티스트 영혈설(The Anabaptist Spiritual Kinship Theory), 그리고 영국 분리주의자 후예설(The English Separatist Descent Theory)을 제시하며 침례교회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현재 남침례교의 대표적인 침례교회사 역사가인 H. Leon McBeth 교수는 영국 분리주의 파생설(The Outgrowth of English Separatism), 성서적 아나뱁티즘의 영향설(The Influence of Biblical Anabaptism), 성서적 교훈의 계속설(The Continuation of Biblical Teachings through the Ages)과 조직화된 침례교회의 전승설(The Succession of Organized Baptist Churches through the Ages)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 두 학설은 Torbet 교수의 전승설을 세분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전자가 침례교회의 가르침들, 특히 침례교회적인 교회관과 목회관에 관한 가르침들이 교회역사를 통해서 계속적으로 존속해 왔음을 강조하고 있다면, 후자는 침례교회가 비록 그 명칭은 달랐어도 예수님 당시부터 지상에 가시적으로 끊임없이 존재해 왔음을 강조하고 있다.

전승설이란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가 바로 침례교회이며 이 침례교회는 기록되어진 교회역사 밖에서 기독교 이단으로 취급받으면서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존속되어 왔다는 주장인데 1930년대까지만 해도 침례교단 내에서 통설의 지위를 유지했던 학설이다. 이 주장은 "침례의 전승"(The Succession of Immersion Baptism)에 근거한 학설인데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침례 요한에게 받았던 침례가 오늘날까지도 계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JJJ Theory).

 

따라서 침례교회는 종교개혁 이후에 나타난 Protestant Church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고 원시 기독교의 모습을 계승하고 있는 가장 성서적인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학설은 역사적 증거가 거의 없고 학문적인 자세가 아니라 신앙적인 독단과 바램,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자기교파 우월주의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거의 지지기반을 상실하고 있는 이론이다.


침례교회의 기원에 관한 최근의 통설은 영국 분리주의자 후예설(The English Separatist Descent Theory)인데,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와 Stuart 왕조시대에 부패하고 타락한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신자들(Separatists)로부터 침례교회가 기원했다고 하는 주장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609년에 영국의 분리주의자 John Smyth와 영국인 피난민들에 의해 화란 땅 암스테르담에서 일반침례교회(General Baptist Church)가, 그리고 한 세대 후인 1638년 경에 런던 근교 Southwark에서 John Spilsbury를 비롯한 분리주의자들에 의해 특수침례교회(Particular Baptist Church)가 세워짐으로써 비로소 침례교회는 지상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급진종교개혁(Radical Reformation)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대륙의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Biblical Anabaptists), 특히 화란의 메노나이트들(Mennonites)이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침례교 기원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대두하게 되면서 침례교회의 기원에 관한 논쟁이 심화되었다.

 

아나뱁티스트 영혈설에 의하면 대륙의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과 초기 침례교도들 간에는 영적인 혈연관계(spiritual kinship)에 있으며, 특히 화란의 메노나이트들이 엘리자베스 여왕시대에 영국의 동부지방에 많이 잠입해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이들이 영국 분리주의 운동의 발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따라서 침례교회의 기원을 단지 영국의 분리주의 운동에 한정시키는 것은 침례교 역사의 풍요로운 유산과 전통을 스스로 제한하거나 포기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아나뱁티스트 영혈설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학자들의 주장을 검토함에 있어서 1950년대에 첨예한 논쟁을 전개하였던 대표적인 두 사람(Hudson 교수과 Payne 총무)의 주장과 최근 2-30년 동안 아나뱁티스트 영혈설을 강력하게 주장해 온 이스텝(W. R. Estep) 교수의 주장을 살펴보고, 그 주장이 갖는 긍정적인 면을 인정하면서도 대륙의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과 침례교도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별성과 불연속성을 제시하면서 그 주장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II. 허드슨 교수와 페인 총무의 논쟁

대륙의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과 영국의 초기 침례교도들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인가, 아나뱁티스트들은 침례교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두 부류의 사람들을 동일시할 수 있는가, 침례교도들의 조상을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에게까지 소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 본격적인 논쟁의 불이 붙었던 것은 1956년에 허드슨(Winthrop S. Hudson) 교수가 영국 침례교연맹(Baptist Union)의 역사관계 계간지인 The Baptist Quarterly에 "Who Were the Baptists?"라는 논문을 게재하면서부터였다.

 

허드슨 교수는 침례교도들은 유럽 대륙에서 발생한 아나뱁티스트들과는 별로 상관이 없고, 영국 내에서 영국 국교회에 반발했던 무리들, 즉 영국의 퓨리턴들과 분리주의자들에게서 파생된 무리였음을 단정적으로 결론내렸다. 그러자 즉각적으로 페인(Ernest A. Payne) 총무는 The Baptist Quarterly 다음 호에서 똑 같은 논문제목에 "A Comment by Dr. Ernest A. Payne on Dr. Winthrop S. Hudson's Article in Our July Issue"라고 하는 편집자의 부제가 붙은 논문을 게재함으로써 논쟁은 불붙기 시작하였다.

(1) 허드슨 교수의 주장

Winthrop S. Hudson 교수는 19세기 중반에 "전승설"에 입각한 침례교회사 책들이 대거 등장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러한 와중에 뚜렷한 역사적인 문헌 증거들이 제시되지도 않은 채 아나뱁티스트들과 침례교도들 간의 영적인 유사 혈연성이 주장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왜 침례교도들은 대륙의 아나뱁티스트들과는 상관이 없는지를 다섯 가지로 요약하여 진술하고 있다.


첫째로, 초기 영국의 침례교도들이 자신들은 아나뱁티스트들이 아님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아나뱁티스트들의 삶과 사상을 강력하게 거부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초기 영국 침례교도들은 신앙고백문들(Confessions)의 표지에 자신들이 아나뱁티스트들로 "일반적으로"(generally), 혹은 "부당하게"(unjustly), 혹은 "잘못"(falsely) 불려지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표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국의 초기 침례교도들은 아나뱁티스트들의 신앙행습이었던 세속관료들에 대한 적대감, 공직수임거부, 군복무거부, 맹세거부 등과 아나뱁티스트들의 특징적인 교리들을 비판하거나 반대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둘째로, 침례교도들은 영국의 회중주의자들(Congregationalists)로부터 연유했다는 것이다.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의 감독정치 혹은 국왕을 수장으로 하는 정치에 대항하여 회중들에 의한 자치적인 정치를 도모했던 자들이 영국 국교회를 정화하려 했거나(The Puritans) 혹은 분리되어 떠나 왔는데(The Separatists), 이들 회중주의자들이 바로 침례교회의 조상들이지 대륙의 아나뱁티스트들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회중주의자들은 당시 영국적인 교회상황에서 영적인 좌파(spiritual leftists)였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나 아직 신자의 뱁티즘(Believer's Baptism)의 신앙적 확신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신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셋째로, 허드슨 교수는 침례교인들이 신자의 뱁티즘을 채택한 것이 반드시 아나뱁티스트들의 영향이었다고 볼 필요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나뱁티스트들이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오직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신자들(Believers)에게 뱁티즘을 베풀었던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영국 내의 국교반대론자들(Non-conformists) 사이에서도 신약성서에 유아세례가 행해졌던 구체적인 실례가 없었고 또한 성서 안에서 뱁티즘이 행해졌던 사건의 정황을 분석해 볼 때 대체로 복음을 듣고 이해하고 믿음으로 반응했던 신자들에게 뱁티즘이 행해진 것에 대해 적지 않은 공감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넷째로, 침례교도들을 아나뱁티스트들과 동일시할 수 없는 이유는 John Smyth의 신앙행적에서 볼 때 더욱 확실하다는 것이다. John Smyth는 1607년에 핍박을 피해 분리주의자들의 무리인 Gainsborough교회를 이끌고 화란의 암스테르담으로 집단이주를 하게 되었고 약 2년 후인 1609년 경에 언약(covenant)에 근거한 교회론을 포기하고 신자의 뱁티즘에 근거한 교회론을 확립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머리 위에 물을 붓는 뱁티즘(Affusion, Se-baptism)을 행한 후 Thomas Helwys를 비롯한 추종자들에게 뱁티즘을 베풂으로써 침례교회를 창설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몇 개월 후 Smyth는 자신이 자신에게 베풀었던 뱁티즘의 정당성에 대해서 의심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뱁티즘의 "연속성"(Succession)이 자신의 앞에서 끊어져 있는 것에 대한 번민이었고 그렇다면 새로 창설한 교회의 역사적인 정당성은 결여되는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미 약 100년 전부터 신자의 뱁티즘을 계속해 온 메노나이트 교회야말로 참 교회라고 생각하여 자신과 자신을 추종하는 교인들을 이끌고 Jan Munter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메노나이트 교회로 들어가고자 신청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담임목사 Smyth의 행보에 대해서 Thomas Helwys는 강력하게 반발하였는데 뱁티즘을 누구에게서 받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며 자신들이 받은 뱁티즘에 하등의 하자가 없고 자신들이 세운 최초의 침례교회는 지극히 정당한 교회임을 주장하였다.

 

결국 Thomas Helwys와 소수의 잔류자들은 담임목사인 Smyth와 그의 추종자들을 징계하여 추방시켜 버린 뒤 1611년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비로소 영국 땅, 런던 근교 Spitalfield에서 침례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한편 Smyth와 그 추종자들은 메노나이트 교회로의 가입 신청을 하였으나 메노나이트 교회로서는 이들 무리들의 신앙을 검토할 필요가 있어서 선뜻 받아주지 않고 기다려 달라는 유예처분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Smyth는 당시 유행 중이던 폐결핵을 앓다가 영적인 방랑자로써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추후에 잔류자들은 메노나이트 교회에 흡수되었다.


이처럼 John Smyth의 신앙행적이 침례교 창설자로서의 확신이 결여되어 있고 그의 추종자였던 Thomas Helwys와의 단절이 너무나 선명하기 때문에, 비록 그가 메노나이트들과 많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Thomas Helwys에 의해 영국 땅에서 새롭게 시작된 침례교회는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 교회와 결코 동일시 될 수도 없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허드슨 교수의 주장인 것이다.


다섯째로, 초기의 영국 침례교도들을 핍박했던 과격한 반대자들은 이들을 아나뱁티스트들과 동일시 하면서 비난을 했는데, 그러나 온건하고 분별력이 있었던 반대자들은 그러한 무조건적인 비난은 정당하지 않다고 하였으며 두 부류 간의 차이를 인정하였던 점을 허드슨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당시 영국 국교회의 감독이었던 Henoch Clapham은 Errors on the Right Hand(1608)에서 "그들(침례교인들)은 브라운파(The Brownists)로부터 파생된 자들이며 스스로를 기존의 교회(the established church)와 분파들(the Dissenters)로부터 분리시킨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국 국교회와 퓨리탄 교회에서 받은 뱁티즘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기술하였다. 이처럼 초기의 침례교도들은 자신들이 대륙의 아나뱁티스트들과 동일시 되는 것에 대해 부당한 처사임을 호소하고 있을뿐 아니라 분별력 있는 핍박자들까지도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허드슨 교수는 침례교도들과 아나뱁티스트들은 상호 무관한 부류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침례교도들은 영국 국교회에 대항하여 개혁을 부르짖었던 무리들(Puritans) 중의 급진적 좌파들(the left-wings)이었으며, 굳이 침례교 역사를 대륙의 아나뱁티스트들의 역사에 접목시킬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아래와 같이 결론 맺고 있다.

침례교도들과 아나뱁티스트들을 동일시 하는 것은 침례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이해와 감사의 원천으로부터 관심을 흩으려 놓는 불행한 결과를 낳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전체 그림에 혼란을 야기하는 요소를 도입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 게 하는 것은 참으로 혼란스럽다. 왜냐하면 이미 지적한 바대로 침례교도들과 아 나뱁티스트들은 실제로 두 가지 다른(two diverse) 그리고 전혀 같지 않은(quite dissimilar) 전통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침례교도들은 영국 회중주의(English Congregationalism) 내에서 연유해서 본질적으로 칼빈주의적 혹은 청교도적인 기독 교신앙 전통을 대변하였고, 반면에 아나뱁티스트들은 초창기에는 16세기 일부 대학 교육을 받았던 인문주의자들(university-trained humanists)에게서 시작되어 에라스 무스를 대표적인 대변자로 갖는 북 유럽 르네쌍스(Northern Renaissance)적인 기 독교신앙 전통을 대변하였다.

(2) 페인 총무의 반박

Ernest A. Payne 총무는 이상과 같은 허드슨 교수의 주장을 마치 망원경을 가지고 어떤 경치를 바라볼 때 시선을 한 곳에만 고정시켜서 보거나 다른 좋은 경치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린 것과 같은 편협한 입장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허드슨 교수는 침례교도들과 아나뱁티스트들이 공유하고 있는 유사점이나 연결점에 대해서는 깡그리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침례교회의 기원과 발전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를 놓쳐버리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페인 총무는 아래와 같은 논거를 제시하면서 아나뱁티스트 영혈설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첫째로, 대륙의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허드슨 교수가 간략하게 특징짓고 있는 것에 비해 훨씬 광범하고도 복잡한 양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스위스 형제단, 후터라이트들, 멜키오르 호프만과 그의 추종자들, 메노나이트들 그리고 이 외에도 수많은 다양한 그룹들이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이들이 종교개혁의 서자들(Step-children of the Reformation)이라고 불리워지고 있기는 하지만 루터와 쯔빙글리의 개혁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그들이 허드슨 교수가 언급한대로 에라스무스나 북유럽 르네쌍스로부터 기원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성경을 신앙과 삶의 기준으로 삼았지만 그들 모두가 "성서적 문자주의자들"(biblical literalists)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좌파들 사이에서 신자들에 의한 "모인"(gathered) 교회, 유아세례에 대한 거부, 신앙과 양심의 자유 등과 같은 공통적인 신앙내용이 있기는 했지만, 그룹에 따라 세속정부, 무기사용, 기독론, 종말론 등에 있어서 다양한 신앙과 신학을 가지고 있었음을 페인 총무는 상기시키고 있다. 그는 허드슨 교수가 16세기, 17세기의 유럽 대륙과 영국에서 전개되었던 개혁의 바람을 너무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또한 제한시키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둘째로, 초기 영국의 분리주의(Separatism) 운동이 어떻게 기원하였는가에 대해서 아직도 상당히 모호한 점이 많이 있음을 페인 총무는 지적하였다. 초기 분리주의 교회들이 켄트(Kent) 지역과 동부 앵글리아(East Anglia) 지역에서 등장하였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였단 말인가 하고 페인 총무는 반문하고 있다. 이 지역들은 16세기 중반에 화란의 피난민들이 많이 이주해서 살았던 곳이고 그들 중에는 아나뱁티스트들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헨리 8세, 에드워드 6세 그리고 메리 여왕 당시에 많은 개혁적인 사상을 가진 신자들이 화형에 처해지곤 했는데 그 가운데에서 적지 않은 아나뱁티스트들이 죽임을 당했던 것은 이미 영국 땅에 아나뱁티스트들이 밀입국하여 활동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허드슨 교수의 주장대로 17세기의 침례교회들이 회중주의(Congregationalism)의 토양에서 발아하여 성장했다고 하더라도 어찌 대륙의 과격분자들의 영향을 입은 자들이 그 당시 영국 땅에서 활동을 한 것이 분명한데, 이들을 깡그리 무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셋째로, 허드슨 교수는 John Smyth와 Thomas Helwys에 미친 화란 메노나이트들의 영향에 대해서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으며 동시에 영국의 일반침례교회에 대해서 별로 주목을 하지 않고 있음을 페인 총무는 비판하였다. 17세기의 거의 모든 침례교도들은 칼빈주의자이며 그들의 교회 정체도 모두 유사한 것처럼 허드슨 교수는 주장하고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 "모인"(gathered) 성도들의 교제인 교회, 신자의 뱁티즘 그리고 신앙과 양심의 자유라는 원리를 확신하고 있었던 초창기 침례교인들은 일반침례교인들이었으며 이들은 대체로 알미니안주의자이었다는 것이다.

 

페인 총무는 John Smyth에게는 물론이지만 영국 땅으로 돌아가서 일반침례교회를 다시 세웠던 Thomas Helwys에게도 역시 메노나이트들과 그들의 알미니안주의 신앙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강조하고 있고, 동시에 17세기 전반기의 초기 영국 침례교회는 획일적이지 않은 다양한 신앙전통들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넷째로,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아나뱁티스트"라는 이름은 폭력(violence)과 반율법주의(antinomianism)를 뜻하는 욕설의 말이었음을 페인 총무는 지적하고 있다. 스위스 형제단의 후예들 가운데 일부가 지나치게 과격하여 핍박을 받음으로 인해서 또 뮌스터 폭동(Muenster Revolt)으로 말미암은 비극적인 참사로 인해서 "아나뱁티스트"라는 말은 유럽 사회에서 혐오와 비난의 상징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의 침례교도들이 "아나뱁티스트"라는 이름을 배격하려 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대륙에서도 그 말이 혐오의 대상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침례교도들이 자신들이 아나뱁티스트로 잘못 불려지고 있다고 언급했을 때에는 그 말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침례교 운동이 전체적으로 대륙에서의 아나뱁티스트 운동과 어떻게 연관이 있었다거나 의존적이었다거나 하는 그런 문제를 건드리는 것은 아니라고 페인 총무는 지적하고 있다.

 

영국 침례교도들 역시 대륙의 아나뱁티스트들처럼 "모인" 교회(gathered church), 신자의 뱁티즘, 신앙과 양심의 자유의 이상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초기 영국의 침례교도들이 스스로를 "아나뱁티스트"가 아니라고 항변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나뱁티스트와의 신앙적 및 신학적, 더 나아가 역사적 관련성을 부정하는 말은 아니었다는 것이 페인 총무의 주장이다.


다섯째로, 허드슨 교수가 "실제로 모든 초창기 침례교도들은 침례교도가 되기 전에 회중주의자들(Congregationalists)이었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페인 총무는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다고 답변하고 있다. Smyth와 Helwys는 분리주의자들의 교회인 Gainsborough교회의 지도자들이었고, 초기 특수침례교회들은 또 다른 분리주의자들의 교회인 JLJ(Jacob, Lathrop, Jesse)교회로부터 유래되어 나왔고, 이들 모교회들은 영국 국교회로부터 직접 뛰쳐나온 분리주의자들(Separatists)이라는 것이다.

 

이들 모두가 허드슨 교수가 주장하는대로 회중주의자들이었다는 근거는 희박한 것이며,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침례교도들은 단순히 회중주의자들로부터 연유한 무리였다거나 그들의 역사를 대륙의 종교개혁의 좌파를 언급하지 않고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페인 총무는 항변하고 있다. 그는 유럽 대륙과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갖가지 종교적 상황과 동떨어진 단절된 상태에서 영국 침례교회의 기원을 이해하는 것은 역사를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17세기의 종교적인 상황은 여러 방향으로부터 태풍이 불어닥쳐서 요동치는 풍랑이는 바다와도 같았다. 가장 강력한 태풍들 가운데 하나가 지난 세기부터 불어왔던 아나뱁티스트 운동이었음을 나는 확신한다. 침례교인들은 그것을 인정하기를 부끄 러워할 필요가 없다. 나는 어떤 외형적이거나 배타적인 의미로 "역사적 전 승"(succession)을 형성하고자 하는데 대해서는 허드슨 교수와 같이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나 아나뱁티스트들과 침례교도들 간에 어떤 연속성을 인식하는 것이 "해"(harm)가 된다거나 "불행한 결과"(unhappy consequences)가 된다고 말하는 것 은 내가 볼 때 역사적으로 매우 건전하지 못한 것 같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오늘 날 모든 교회들이 빚을 지고 있는 매우 고상한 운동에 대해서 불공정한 평가를 내 리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III. 이스텝 교수의 이중조상설(Dual Parentage)

1970년, 80년대부터 침례교회의 기원에 관하여 대륙의 성서적 아나뱁티즘의 중요성을 활발하게 강조해 온 학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William R. Estep 교수이다. 그는 이미 1968년, 69년도에 "Anabaptists and the Rise of English Baptists" 라는 논문을 통해서 영국 침례교회의 기원과 관련하여 대륙의 아나뱁티스트들이 미쳤을 영향에 대해서 논의한 바 있었고, 동시에 급진종교개혁의 역사에 관한 그의 저서 The Anabaptist Story(『재침례교도의 역사』)에서도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였다.

 

이후 1987년에 미국 남침례교의 대표적인 역사관련 계간 학술지인 The Baptist History and Heritage에 "On the Origin of English Baptists"라는 논문에서 자신의 확신을 더욱 발전적으로 정리하였다. 영국의 분리주의 운동과 대륙의 아나뱁티즘 운동 양자 모두가 침례교회의 기원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그의 주장을 필자는 이중조상설(Dual Parentage)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그는 아래와 같이 결론 맺고 있다:

필자가 영어, 라틴어, 독일어, 화란어 등으로 기록된 원사료들을 연구해 본 바에 의하면, 영국 침례교회의 기원에, 일반침례교회이든 특수침례교회이든, 아나뱁티즘 의 영향력을 부정하는 것은 부적절한(unwarranted) 것 같다. 영국 침례교도들은 그들의 기원에 있어서 영국 분리주의와 화란의 아나뱁티즘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 이다. 근대 침례교도들의 형성은 이렇듯 이중의 조상(dual parentage)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교회의 본질, 신자의 뱁티즘, 선교적 열정, 종교의 자유 등은 침례교회의 특징이기 이전에 이미 아나뱁티스트들의 등록상표이었음에 비하여, 아나뱁티스트들과 뚜렷이 구분되어지는 침례교도들의 특징적인 원리들은 세속국가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태도와 무기사용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이다.

 

일반침례교도들과 특수침례교도들 양자 모두는 그들의 신앙고백들에서 세속국가의 공직은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신 것 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공직을 가질 수 있음을 천명하였다. Helwys는 더 나아가 "정의로운 전쟁"(just war)을 옹호하였으며 그리스도인들이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Smyth처럼 완전한 종교의 자유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침례교도들이 "아나뱁티스트들"은 아니었지만, 화란 의 아나뱁티스트들과 영국의 분리주의자들이 첫 영국 침례교도들을 출산하기 위하 여 연합하였다(merged to produce). 후대의 침례교도들이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 두 조상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스텝 교수는 비록 최초의 침례교회가 영국인들에 의해 기원하긴 했지만 단순히 섬나라 영국 내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분리주의자 John Smyth가 화란 땅에서 피신하며 화란의 아나뱁티스트들과 상호 신앙적인 영향을 주고 받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하나님과의 언약에 기초한 교회관을 철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체험한 신자가 뱁티즘을 받음으로 교회회원이 된다고 하는 신자의 뱁티즘에 기초하여 교회를 새롭게 시작한 것은 전적으로 화란의 아나뱁티스트의 영향이었음을 강조하였다.


더 나아가 이스텝 교수는 Smyth가 그의 추종자였던 Thomas Helwys와는 구별되어지는 신앙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와의 관계에 있어서 단절성보다는 연속성을 더 많이 가진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비록 Helwys가 Smyth와 그 추종자들을 징계하여 추방하고 1611년 영국 땅으로 다시 돌아와서 새롭게 침례교회를 시작했지만 여전히 Smyth와 화란의 아나뱁티스트들의 영향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는 Smyth와 Helwys의 유사성 및 연속성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첫째로, 자신들의 입장이 정당하다고 확신하게 된 권위를 두 사람 모두 기독론적으로 해석한 신약성경에 두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구약성경을 정경으로 거부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궁극적인 권위의 원천으로 삼았던 것은 신약성경,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라는 관점에서 본 신약성경이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스텝 교수는 그들 두 사람의 교회론이 기본적으로 아나뱁티스트적인 교회론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교회는 Gainsborough교회의 분리주의자들이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구약성경의 성도들"의 패턴에 따른 언약관계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신앙고백과 그에 따른 뱁티즘에 근거하여 형성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적이었다는 것이다.


셋째로, 교회의식을 이해하는 면에 있어서도 양자는 서로 일치하였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유아세례(infant baptism)와, 성례의식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전달통로가 된다든지 영의 양식이 된다는 주장인 성례전주의(sacramentalism)를 배격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믿음의 고백이 불가능한 유아에게 뱁티즘을 베푸는 것은 신약성경적인 뱁티즘의 의미를 파괴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넷째로, 이스텝 교수는 구원론에 있어서 두 사람 모두 알미니아니즘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영국의 일반침례교회와 화란의 메노나이트 교회는 신학적인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로, 종교의 자유와 종교문제에 있어서 세속정부의 공직자가 취할 태도의 한계에 관하여 이 두 사람은 모두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심과 신앙의 자유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는 대륙의 아나뱁티트들의 기본적인 확신이었는데, Smyth와 Helwys 역시 이 문제에 있어서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스텝 교수는 Smyth와 Helwys 사이의 차별성과 단절성보다는 유사성과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Helwys와 그의 추종자들이 영국땅에 세웠던 일반침례교회가 화란의 아나뱁티스트들, 즉 메노나이트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침례교회는 영국의 분리주의 운동과 대륙의 아나뱁티즘 운동 양자의 영향으로 잉태되었음을 주장하면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하면, 영국 침례교도들은 대륙의 아나뱁티즘의 영향을 입어 영국의 분 리주의 운동으로부터 기원하였다(Simply stated, English Baptists arose out of English Separatism under the influence of continental Anabaptism). 그러므로 침 례교인들의 삶에는 수정된 칼빈주의와 수정된 아나뱁티즘 사이의 긴장이 존재한다. 어느 한 쪽을 전적으로 부정한다면 오늘날의 침례교회의 진면목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IV. 아나뱁티스트 영혈설에 대한 비판적 고찰

이상에서 비록 제한된 학자들(페인 총무와 이스텝 교수)의 아나뱁티스트 영혈설을 살펴 보았는데, 일면 그들의 주장이 갖는 타당성과 유용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많은 학자들은 영국 분리주의자 후예설의 입장에 서 있다. 필자 역시 대륙의 아나뱁티스트들을 침례교인들의 조상으로 간주하는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영국 분리주의자 후예설이 우세하게 된데에는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역사적 비평주의 방법론과 엄격한 문헌적 사료에 근거한 역사기술이 힘을 얻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19세기 중반기부터 유행했던 전승설적인 침례교 역사관과 지계석주의 운동(Landmarkism)이 20세기 중반 이후 힘을 잃게 되면서 신화적이고 희망적이고 정황적인(circumstantial) 증거에 근거한 역사기술이 학자들로부터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나뱁티스 영혈설의 가장 심각한 취약점은 명확한 신빙성 있는 사료가 빈약하다는 점이다. 대륙의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영국 땅에 잠입해 들어온 것도 사실이고 당시 의식 있는 지성인들과 신자들에게 신앙적인 감동과 영향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인정하더라도, 사료로써 인정할만한 증거들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간접적인 증거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역사가 객관성 있는 학문적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사료적 가치가 있는 증거들이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해서 영국분리주의자 후예설은 침례교 기원을 설명함에 있어서 분명한 역사적 연결고리(historical connection)를 제시해 주고 있다. 다름이 아니라, 영국 일반침례교회의 창시자인 John Smyth와 Thomas Helwys가 몸 담고 있었던 모교회 Gainsborough교회는 Midlands지방의 Gainsborough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분리주의자들의 교회였던 것이다. John Smyth가 그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받은 후 그 교회는 양분되었는데, 그들 중 John Robinson을 추종하던 교인들("Scrooby 파")은 일시 신앙적인 박해를 피해 화란으로 피신했다가 1620년 Mayflower호를 타고 미국 땅으로 건너갔던 Pilgrim Fathers가 된 사람들이다. 그들 중 William Brewster, William Bradford 등은 미국 식민지를 개척하고 미국 땅에 신정정치(theocracy)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를 세웠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John Smyth가 이끌었던 Gainsborough교회의 다른 한 쪽은 1607년 화란 Amsterdam으로 이민을 하였고 1609년 경 신자의 뱁티즘에 근거한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웠으며 또한 1611년 Thomas Helwys, John Murton 등은 영국 런던 근교 Spitalfield에서 새롭게 침례교회를 시작하여 영국 일반침례교회의 역사를 열었던 것이다. 이렇듯 영국의 일반침례교회는 분리주의자들의 교회를 모교회로 하여 탄생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영국의 특수침례교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1616년에 Henry Jacob이 런던 근교 Southwark에 영국 국교회로부터 뛰쳐나온 분리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개척했고 그 후 초창기에 John Lathrop, Henry Jesse 등이 담임목사로 봉사했기 때문에 후대에 이 분리주의 교회는 JLJ(Jacob, Lathrop, Jesse) 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1633년에 Samuel Eaton, Richard Blunt, Marke Luker 등이 유아세례를 반대하면서 이 교회를 탈퇴하였고, 1638년에는 John Spilsbury와 소수의 추종자들이 또 같은 문제로 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결국 John Spilsbury는 1638년에 Samuel Eaton 등과 함께 신자의 뱁티즘에 기초하여, 형식에 있어서도 침수침례(Immersion)를 행하면서, 그리고 구원론에 있어서는 칼빈주의를 채택하여 영국 특수침례교회를 창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영국 특수침례교회 역시 당시의 분리주의자들의 교회였던 JLJ 교회를 모체로 하여, 그 교회로부터 파생된 교회였던 것이다.


Southern 침례신학원의 교수를 역임한 바 있는 Glen H. Stassen 교수는 1962년도에 "Anabaptist Influence in the Origin of the Particular Baptists"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일반침례교회보다 한 세대 후에 발생한 특수침례교회의 기원에서 대륙의 아나뱁티스트들의 영향의 흔적들이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영국 침례교회를 이해함에 있어서 뱁티즘의 신약성서적인 의미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부활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침수침례(immersion)를 행한 특수침례교도들을 오늘날의 침례교회의 조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1539년에 출판된 Menno Simons의 "Foundation of Christian Doctrine"의 내용과 1644년에 발표된 영국 특수침례교회의 최초의 신앙고백인 "제1차 런던신앙고백"(The First London Baptist Confession)을 비교 연구해 본 결과 많은 부분에서 유사한 내용을 발견하게 되었다. 후자의 표현들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에서 Foundation Book의 내용을 직접 인용하기도 했고 특히 교회론과 관련되는 부분에서는 거의 일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런던 신앙고백이 구원론에 있어서는 칼빈주의의 기조를 유지하고 있지만 Menno Simons의 신학적인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고 있다는 점에서 영국 특수침례교회의 기원 역시 대륙의 Anabaptism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는 것이 Stassen 교수의 요지이다. 필자는 이러한 Stassen 교수의 연구가 아나뱁티스트 영혈설을 뒷받침 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100년 전에 출판된 저술이 영국 특수침례교도들의 신앙과 신학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Menno Simons라는 인물이 영국 특수침례교회의 기원과 직접적인 역사적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침례교 기원론과 관련한 논의의 주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스위스 형제단(Swiss Brethren)이나 Menno Simons를 비롯한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을 조상으로 간주하고 있는 교단들과 교회들이 따로 있다는 점을 필자는 지적하고 싶다. 즉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Mennonite교회 혹은 Hutterite교회, 혹은 어떤 Brethren Church들에서는 그들의 역사를 이들에게까지 소급을 하고 있다.

 

비록 이들 교단이 숫적으로 큰 교세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미국과 같은 현대 자본주의 기독교계를 향해서 뼈 있는 발언을 하고 있는 영향력 있는 교단임에는 틀림이 없다. 반전시위와 세계평화운동, 환경의 보전과 보호운동, 신약성서 시대의 원시적인 복음의 강조, 교회의 세속화와 자본주의화에 대한 반발, 교회의 공동체성의 회복, 건전한 기독교 문화의 구축 등을 위한 이들의 노력은 평가 받을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이 조상으로 간주하고 있는 기독교운동에 대해 침례교도들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데에는 적지 않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살펴본 바대로 아나뱁티스트 영혈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아나뱁티스트들과 침례교도들의 유사성과 연속성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이 두 부류 간에는 차이점과 불연속성도 적지 아니하다.

 

부류 간에 가장 중대한 차이점이라면 세속정부나 세상에 대한 태도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Balthasar Hubmaier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세속정부를 자신들의 "복음적인" 기독교운동에 대해 핍박을 가하는 적그리스도적인 기관으로 이해했고 따라서 세속정부의 공무원이 자신들의 교회에 회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했을뿐만 아니라 교회 회원이 공무원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았다.

 

세상을 향해서도 부정적이고 배타적이고 은둔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세상은 복음으로써 정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았지 세상을 적극적으로 섬긴다든지 세상을 향하여 건설적으로 기여해야 한다는 자세를 갖지 못하였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탈세상적이고 타계적인 신앙, 또 어떤 극단주의자들은 시한부 종말론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아나뱁티스트들이 로마 카톨릭교회로부터는 물론 관료적 종교개혁자들(Magisterial Reformers) 그리고 이들을 후원했던 세속 권력자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침례교도들의 세속국가와 세상을 향한 태도는 전혀 그러하지 않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써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penetrating)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며 어두움을 몰아내는 등 적극적이고 기여적이고 봉사적인 태도를 가질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나뱁티스트들과는 구별된다고 하겠다.

 

 


또한 아나뱁티스트들은 극단적인 평화주의자들(extreme pacifists)로써 어떠한 전쟁에도 참전하기를 거부하고 무기의 사용을 원치 않았다. 십계명 가운데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문자적으로 이해했으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총칼을 들고 다른 사람들을 죽이는 전쟁에 참전할 수 있느냐는 논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침례교도들은 평화를 사랑하지만 아나뱁티스트들처럼 일체의 전쟁을 죄악시하는 극단론자들이 아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전쟁이나 정당한 목적을 위한 정의로운 전쟁을 위해서는 기꺼이 무기를 들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영국을 대항해서 미국의 독립을 위한 해방전쟁(Revolutionary War, 1775-1781)을 수행했을 때 미국의 침례교도들은 독립이란 정당한 명분을 위해 많은 희생의 피를 흘렸고, 독립 후에는 이러한 좋은 애국적 명성을 인해 침례교회가 급속히 부흥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아나뱁티스트들의 후예들 가운데에는 아직도 세상을 등지고 집단촌락을 형성하여 은둔적인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는 성도들이 있다. 자동차, 텔레비전, 전기시설 등의 현대문명이 자신들의 순수한 신앙과 때묻지 않은 삶을 더럽힌다고 생각하고,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세속적인 공립학교보다는 자신들이 직접 운영하는 학교에서 신앙교육과 자신들의 문화보전을 위한 교육을 시킬 것을 고집하기도 한다.

 

그러나 침례교도들은 공동체 생활을 강요하지도 않고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반문화적, 반세상적인 삶의 태도를 권장하지도 않는다. 이처럼 아나뱁티스들과 그들의 후예들의 신앙과 신앙적인 삶이 침례교도들의 그것들과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음을 고려해도 아나뱁티스트들을 침례교도들의 조상으로 간주하는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침례교회의 기원과 관련하여 생존해 있는 권위 있는 학자들 가운데 영국 침례교 역사가인 Barrington R. White 교수가 있다. Oxford 대학교 Regent's Park College에서 역사신학 교수로 봉직한 후 최근 은퇴한 그는 침례교회는 당연히 영국의 Puritan-Separatist 전통 가운데 좌파(Left-wing)로부터 기원하였다고 주장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국 분리주의 운동에 아나뱁티스트들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의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 세 가지 요인들로 미루어 볼 때 "실질적으로 해결 불가능(virtually insoluble)" 하다. 첫째로 양 부류(아나뱁티스트들과 분리주의자들-필자 주)가 독자적으로 같 은 결론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두 부류 모두 교회 생활과 질서를 위해서 공 히 성경을 궁극적인 권위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비록 분리주의자들이 아나 뱁티스트들로부터 무엇인가 배워왔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확신이 성경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 을 것이고, 또한 아나뱁티스트들에게서 배웠다고 인정했다면 그들은 16세기, 17세기 의 청중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을 것이다.

 

영국의 분리주의자들도 "아나뱁티스트" 라는 용어를 싫어하였고 자신들이 그런 "상표"(label)로 "비방"(libel) 받는 것을 피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 . . 셋째로 영국의 분리주의운동의 발전과정 속에는 아나뱁 티스트들의 영향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도 침례교회가 잉태되고 탄생되는 모습을 충 분히 설명할 수 있다. 분리주의 후예설의 입장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의 퓨 리타니즘과 그 발전과정을 연구하면 이용가능한(available) 신빙성 있는 사료 (plausible sources)가 많이 있는데 비해서, 대륙의 아나뱁티스트들이 영국의 분리주 의의 형성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주장을 뒷받 침할만한 증거입증의 책임(the onus of proof)이 있다.

White 교수 역시 아나뱁티스트 영혈설은 정황적인 증거(circumstantial evidences)는 있을지 모르나 확실한 문헌적 증거(documentary evidences)의 빈곤으로 인해서 학술적인 가치를 유지하기에 한계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고, 또한 성경을 궁극적인 권위로 인정했던 분리주의 운동 자체 안에 침례교회를 배태할 진리를 내재적으로 품고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으며 구태어 대륙의 아나뱁티스트들의 영향을 문헌적인 증거 없이 끌어들이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 될 수 있으며 상상과 바램에 근거한 주관주의적인 역사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

V.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영국의 일반침례교회와 특수침례교회의 기원을 설명함에 있어서 대륙의 아나뱁티즘의 영향 여부에 관하여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중심으로, 그리고 아나뱁티스트들과 침례교도들의 신앙과 삶의 차이를 검토하면서 살펴보았다. 아나뱁티스트 영혈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아나뱁티스트들이 전적으로 모든 침례교도들의 조상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고, "어떤 침례교도들"(John Smyth와 그의 영향을 받았던 일부 영국인 일반침례교도들)이 "어떤 특정한 때"(17세기 초)에 "어떤 아나뱁티스트들"(화란의 Mennonites 가운데에서도 온건한 자유주의적인 Waterland파 성도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대로 아나뱁티스트들과 침례교도들 간에는 적지 않은 신앙적 및 신학적 유사성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후대에 발생한 침례교도들이 아나뱁티스트들로부터 신앙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필자는 영향을 받은 것과 역사적 연관관계를 갖는 것과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위스 형제단이 1524년 10월에 있었던 공개토론회(public disputation, 10월 논쟁)에서 스승이었던 쯔빙글리와 결별을 하고 이듬 해(1525년) 1월 21일 밤 신앙고백에 근거한 뱁티즘을 베풀면서 근대적인 의미의 자유교회(Free Church 혹은 신자의 교회 Believers' Church)가 시작되었는데, 침례교회 역시 이러한 큰 물줄기 가운데 한 지류라는 점에서 대륙의 아나뱁티즘과의 신앙적인 관련성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나뱁티스트들이 강조했던 "모인" 교회(Gathered Church), 신자의 뱁티즘, Nachfolge Christi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헌신적인 제자도의 삶, 양심과 신앙의 자유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 등의 신앙원리는, 침례교회도 역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신앙원리이다.

 

그러나 필자는 침례교회의 기원과 관련하여 근원적인 뿌리를 찾고자 할 때에는 역사적인 연결고리가 확실한 영국의 분리주의 운동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반침례교회의 모체가 되었던 분리주의자들의 Gainsborough 교회, 특수침례교회의 모체가 되었던 또 다른 분리주의자들의 JLJ 교회, 이들로부터 분열되어 나온 성도들이 "신자의 뱁티즘"과 "회중정치" 원리를 중심으로 이룩한 교회가 바로 오늘날의 침례교회의 뿌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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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inbora.com/gnuboard/bbs/board.php?bo_table=board6&wr_id=15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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