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성경에는 밧모섬이라고 되어 있지만 그리스어로는 파트모스입니다. 그 뜻은 "송진" 이라는 뜻으로 터키 밀레도에서 남서쪽으로 약56km 떨어져 있으며 지금 쿠사다시 항구에서 약100km 떨어진 에게해의 작은 섬입니다. 섬은 터키 본토와 가까이 있지만 그리스 영토입니다. 이곳으로 가려면 터키의 구사다시에서 용선하여 가게 되는데 약3시간30분 정도 소요됩니다.
밧모섬은 전체가 화산암으로 되어 있어 포도나 밀이 재배되고 있는데 섬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그 길이가 약16km에 이르고 동서의 폭은 들쭉날쭉하며 밧모섬을 대표하는 스칼라 항구에서의 폭은 약1km도 안되는 작은 섬입니다. 요한 수도원에서 바라보는 밧모섬은 나무꾼이 도끼로 찍어서 만든 모습처럼 불규칙한 해안선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밧모섬의 가장 큰 문제는 물과 땔감과 식량이라고 합니다. 물이 나지 않기 때문에 우기인 겨울에 물을 받아 두었다가 여름에 사용한다고 합니다.
밧모섬은 로마 제국 당시에 중법들의 유배 장소로 이곳에 끌여온 죄수들은 채석장에서 강제 노역을 해야 했습니다. 죄수들은 물이 없어 갈증으로 허덕이여야 했을 것이며 겨울이면 땔감이 없어서 추위에 떨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수들을 지키는 로마 병정들 사이에서도 이곳으로 오는 병정들은 문제가 있었던 군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의 말과 행동은 거칠었고 무자비하게 죄수들을 다스렸던 곳이 바로 밧모섬입니다.
이곳에 성지 순례 오신 분들은 단지 사도 요한이 주님으로 부터 계시를 받아 계시록을 썼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뿐 이곳의 사정은 거의 모르고 지나가고 있는 것이 현재의 성지 순례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살기 힘든 이곳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은 터키 본토에 있는 성도들을 걱정하면서 계시록을 썼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섬에 성지 순례를 가시면 꼭 순례하는 곳이 바로 사도요한 계시동굴입니다. 이곳 동굴 입구에는 사도요한의 제자 푸로코로스를 성화가 있습니다. 그리스 정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요한은 자신이 받은 계시를 푸로크로스에게 구술했고 푸로크로스는 이를 기록하여 계시록으로 남겼다고 합니다.
로마 제국의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자기의 질녀인 플라비아 도미틸라를 폰티아라는 섬으로 유배를 보냈으며 그녀의 남편 클라멘트를 사형시킬 정도로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입니다. 이때 사도 요한도 체포되어 다른 중범자들과 함께 밧모섬으로 유배 되어 강제 노역을 하게 됩니다. 이때 에베소에 있는 사도 요한의 제자들은 푸로코로스를 밧모섬에 보내어 사도 요한을 도우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 섬은 1088년 비잔틴 시대 황제 알렉시우스 콤메누스의 허가로 성 크리스토롤로스가 아르테미스 신전 터에 '요한 수도원'을 세웠습니다. 요한 수도원을 세운 크리스토롤로스는 터키의 니케아에서 태어나 부르사 근처와 유대 광야에서 은둔 생할을 한 후 밧모섬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가 세운 요한 수도원은 비잔틴 제국의 원조를 받음으로서 에게해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밧모섬을 크리스토롤로스에게 주면서 요한 수도원의 주교들이 밧모섬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16세기에 오스만 터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밧모섬은 자치 행정을 하다가 1832년 터키가 직접 통치하게 되었고,1912년 1차 대전이 끝난 후에 이탈리아로 귀속되었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7년 파리 협정에 의하여 그리스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계시 받은 밧모섬
기독교가 로마 황제에게 극심한 박해를 받던 어두운 시기에 사도 요한은 이곳 밧모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인류의 미래를 보여주는 계시를 받고 요한계시록을 기술했다. 요한게시록은 오늘날 우리는 미래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게 한다.
밧모섬은 그리스의 영토이다. 하지만 터키 해안에서는 불과 60㎞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나 아테네에서는 250㎞나 떨어져 있다.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아테네 피레우스 항에서 배로 가는 방법과 아테네에서 비행기로 사모스섬까지 가서 그곳에서 배로 가는 방법이 있으며 터키 에베소의 쿠사다시항에서 배로 가는 방법이 있다. 고스섬 방문 일정을 마친 나는 사모스섬 방문에 앞서 두 섬 중간에 있는 밧모섬을 일주하기로 하고 오후 1시에 밧모섬으로 가는 배표를 샀다. 배는 출항한지 2시간30분만인 오후 3시 30분께 밧모섬 스카라 항구에 도착했다.
밧모섬의 크기는 남북이 약 16㎞, 동서로는 넓은 곳이 약 10㎞이며 중간 부분은 잘룩하여 너비가 불과 1㎞정도밖에 안된다. 해안 굴곡이 심하여 주위 둘레는 약 60㎞에 이르나 면적은 우리나라 영종도 크기와 거의 같은 34㎢이다. 주민은 2700여명인데 반 이상이 섬 중앙의 산언덕에 있는 호라 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특히 이곳의 집들은 대부분 백색이어서 매우 깨끗하게 느껴진다. 이곳의 교통수단은 굴곡이 심한 지형상 특징 때문에 승용차보다는 오토바이가 많이 이용된다. 관광객들 역시 오토바이를 빌려 사용한다. 나 역시 오토바이를 빌려 섬을 일주하려고 했으나 에게해의 다른 섬들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우리나라 운전면허증이 인정되지 않아 할 수 없이 이튿날 택시를 대절하여 가장 먼저 산 중턱에 있는 요한 계시동굴을 찾았다.
로마제국 시대에 밧모섬은 정치•종교 중범자들의 유배처였는데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힘든 생지옥이었다. 예수의 제자 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은 사도 요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이 섬으로 유배됐다가(주후 95년께•계1:9) 도미티아누스가 죽은 후 석방돼 96년 에베소로 귀향하였다고 한다. 이곳 전승에 의하면 요한은 돌을 깨는 일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아직도 이곳 채석장에서는 돌을 생산하고 있다.
사도 요한이 유배생활 중에 계시를 받았다는 산 중턱의 요한 계시동굴 안에는 요한이 계시를 받을 때 갈라졌다고 하는 바위가 있고 바위벽 1m 높이에는 요한이 기도하고 일어날 때마다 손을 짚어 파였다는 손자국이 있어 인류의 미래를 위한 그의 간절한 기도의 숨결이 느껴진다. 계시 동굴 입구에는 눈이 어두운 요한 대신에 계시의 내용을 대서한 요한의 제자 브로고로 집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사도행전 6장 5절에 따르면 브로고로 집사는 예루살렘 교회 초대 7집사 중 한 사람으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계시 동굴에서 나와 호라 마을로 향하면 마을 위 산정상에 요한 수도원이 있다. 요한 수도원은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성으로 섬을 압도할 듯 버티고 서 있다. 이 수도원은 1088년 수도자 성 크리스둘툴러스가 사도 요한을 기념하여 세웠고 이 지역에 자주 출몰하는 해적들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요새화된 것이었다. 원래 이 장소는 그리스 여신 아르테미스의 신전이 있었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 수도원에는 값진 보물과 희귀한 성경이 많은데 특별히 500년대에 기록한 마가복음은 매장 첫 글자를 순금으로 썼고 나머지는 은으로 썼다. 그리고 해상무역으로 큰 돈을 번 상인들이 안전 항해를 기원하며 많은 보물을 기증, 엄청난 보물이 있다고 한다. 특히 이곳에 있는 계시록의 책을 펼쳐 들고 있는 요한의 초상화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성화이다.
밧모섬에 기독교가 정착하게 된 것은 바로 요한수도원이 세워지면서부터다. 이 수도원이 세워지면서 다른 많은 수도원과 교회들이 속속 세워졌고 수도사들의 학문 연구를 위해서 도서관도 세워졌다. 1453년 이후 터키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로마 교황청의 지원을 받기도 했으나 16세기에는 터키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1912년 이탈리아에 귀속되었다가 1947년 그리스에 양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이곳에는 뜨거운 태양과 물이 귀한 기후 때문에 약간의 곡식과 채소,포도가 재배될 뿐이다.
요한수도원을 내려와 남쪽길로 항구에 내려오면 엘리야 기념교회가 산 중턱에 자리해 있으며 오른쪽에는 요한신학교가 있다. 요한신학교는 1713년에 창건되었고 그리스정교회 신학교 중 뛰어난 사제들을 배출한 우수한 신학교다.
기독교가 로마 황제에게 극심한 박해를 받던 어두운 시기에 사도 요한은 이곳 밧모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인류의 미래를 보여주는 계시를 받고 요한계시록을 기술했다. 요한게시록은 오늘날 우리는 미래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모든 신앙인에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의 메시지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