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스크랩] 101018인천답동침례교회와 시은고등공민학교

INJESUS 2013. 4. 22. 14:45

101018인천 답동 시은 고등 공민 학교

부친 께서 침례교 인천 숭의동 성애원 원장으로 계시면서 잠시 이사로 참여하셨던 인천 답동 시온 고등 공민학교는 1953 6월에 개원한 대전 침신 대학과 역사를 같이 한다.

한국 침례교 남북한을 오가시며 사역하시던 전북 익산 출신의 김용해 목사님이 1964 3월에 발행하신 대한 기독교 침례회사 몇가지 인천 시은 고등 공민학교 관하여 기록을 남겨 놓으셨다.

학교를 나오신 분이 기록에는 1946 해방 이듬해에 설립된 인천 답동 침례교회에서 침례도 받으시고 교회와 같은 부지에 있던 시은학교를 다셔셨다고 한다.

같은 교단의 고아원 성애원에서 성장한 성애원과 사라진 인천 숭의동 숭의 침례교회 관한 이야기를 블로그에 것을 보시고, 혹시나 인천 시은 학교 관한 기록을 물어 오셨다.

 

1958 5 12 점촌 교회에서 48 총회를 마지막으로 교단은 분열하다. 한국 침례교의 역사를 남침례교가 들어온 한국동란으로 시작하려한 나요한선(John Abernathy)교사와 이에 동조한 젊은 세력들과 교단에서 유입돤 신진세력들에 반해1896 세워진 강경교회 전부터 이뤄진 사역들을 지키려던 남북한 동아기독교노장 세력들이 반목을 갖게 것이다.

결국 이듬해 1959년 나요한 선교사는 본국(미국)으로 돌아갔다.

반목의 세력 다툼 속에 놓인 것은 신학원들과 고아원 이었다.

분열의 중심이 나요한 선교사가 초대 이사장으로 있던 대전 침례 신학원은 젊은 소장들의 근거지여서 1959 분열 총회의 신세력 개최지가 되어서 많은 피해를 입지 아니하였다.

하지만, 나선교사와 각별하였고 나선교사가 고아원 성애원에 원장으로 추천 임명한 부친은 공교롭게도 할아버지부터 신앙을 지킨 펜공부(펜위익 선교사) 세운 동아기독교출신 노장파를 떠날 없었다.

해서, 결국 반대파가 권총까지 동원하여 성애원을 수중? 넣으려는 무력행사가 일어나고, 우리는 고아원에 감시 감금되는 사태로 까지 번지고 말았다.

그냥 스스로가 언제부터인지, 4살정도라고 믿고 있던 날의 광경을 이제 60으로 가는 세월인데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고아원의 철문을 봉쇄한 점거자들을 뚫고 철문을 열려고 하시던 부친은 맞아서 였는지 등에 많은 피를 흘리시고 있었다. 런닝구(런링셔츠) 갈기 갈기 찢어져 있었다.

흐미하게 어머니와 어둠을 뚫고 고아원을 탈출하기 위해 고아원 조그만 소나무 쪽으로   가는 사이로 기억이 있다. 소나무 십여 그루가 있고 원두막이 있던 조그마한 언덕 조그만 지나면 낮은 철망이 있었다. 곳만 지나면 되는데, 그만 오마니와 나는 그곳에서 붙잡히고 모양이었다.

고아원이 폐쇄되고도 장가가기 전까지도 자주 놀러 오던, 인천 공고 깡패 풍길이 형이 오면 오마니는 조놈 때문에 잡혔다 핀잔을 주시곤 했다.

7형제들 중에 막냇누이와 나만 미리 인천에 내려와 있었던 같은데, 오마니는 내가 아들이고 막내라서 나만 데리고 탈출을 시도 하신 같다. 내가 귀여워서 그러셨나? ㅋㅋ

하여간,  성애원은 폐쇄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인천 시온 학교 문제가 심각했다.

왜냐하면, 부지가 인천 답동 침례교회 같이 있어서 교회 측과 학교 인사등 관계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문제가 커질 밖에 없었다. 학교 문제는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되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법정 문제로 까지 커졌을 것이다.

숭의동 고아원 성애원 식구들이 답동 침례교회에 출석하였고, 부친께서 시은학교이사로도 동하셔서 부친께서는 교단 분열 당시 상황을 알고 계셔서 어린 나에게도 내용을 몇번 이야기 하신 적이 있다. 하지만 3년전 부친께서도 돌아 가시고 또한 내용을 알지 못하니 기억되는 내용이 없다.

일단 1964년김용해 목사님이 기록하신 대한기독교침례회사 내용을 살펴보자.

 

시대별로 역사를 정리하시면서 한국동란 일본에 주재하고 있던 남침례교동양 총책 꼬딘박사와 시작된 협력은 전쟁 직전 들어온 나요한 선교사와 전쟁 이루워진 많은 구제사업이 자리를 잡으면서 1952 충남 부여 칠산에서 노채천홍회장의 사회하에 이루진 총회에서 꼬덴 박사의 구체적인 사업 계획이 발표되었다.

전해인 1951 이미 재단 법인이 설립되고 안대벽, 나요한, 신혁균, 노재천, 장일수 5인의 목사가 재단이사로 선정되고 안대벽목사가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것을 대한 기독교 침례회 연맹총회 시대라고 하는데, 연맹 총회시대의 사업은

1.       1. 각처 교회 확장

2.       2. 구호기관을 세우고

3.       3. 많은 선교사가 참여하였으며

4.       4.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때, 동란 직후 침례교회는 23개의 신설교회에 장학생 200여명을 새우고 개척전도인을 39명이나 파송했다.

부산 충무로 교회 마당에서 시작된 군의관들의 의료기관 영도로 이동하면서 구호 병원으로 확장되고 부산침례병원 시작이었다.

수원에도 구호병원 설치하고, 인천시 경동에 고아원을 설립했다.

부산 범일동교회(이란기)

 

1952년에는 미국 워싱톤 DC 초기 유학생이신 한태경목사님(소천)이 정용운, 최형근, 뉴욕의 김장배 목사님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101027일 현재 뉴욕 이창송(88세, 1923년 계해생) 증언에 의하면 이창송 목사님은 이해 전북 용안 침례교회 에서 김용해목사님의 인도로 사역을 시작하시고 1956년 목사안수를 받고 원주 궁촌 침례교회를 개척하셨다고 한다.(침례사에는 1958년)


그리고, 부래남, 간호원이 오고 래이(이대복, 도월태) 선교사 부처등 선교사들이 속속 내한했다.

, ‘침례회 성경학원을 1953 6월에 대전시에서 개원하고 원장에 나요한 선교사와 교사에 한기춘, 최형근, 한태경, 제목사가 각각 취임하였다. 인천에 시온고등고임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이희영씨가 부임하였다.’

 

이외에 학생회, RA, GA, BTU등이 발족하고 총회기관지 뱊티스트 창간되었다.

교세는

1.       목사 19

2.       전도사 57

3.       침례인 1356

4.       교회 87개소와 12구역

으로 확장 되어다.

 

그런데, 이때 재밌는 일이 발생한다.

동아기독교 선교사 였던 펜공부(펜위익) 모시고,

원산의 재단 관리자 중의 사람이였던 안대벽 목사가 1952 총회장을 역임하고 다음해인 1953 유학 미국으로 이한 이였다.

부인 이순도 여사와 함께 유일하게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던 안목사는 나요한 선교사의 가장 신임받는 보필자였다.

미국 유학을 가게 되었는지는 없지만, 1년동안 선교사의 보필자로써의 역할을 비운 일은 차후 교단 분열의 원인이 된다.

결국 안대벽목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선교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영어권 유입자들과 합류한 젊은 신세대들은 세대들과 대립한다. 전쟁 침례회 눈부신 성장에도 불구하고 분열로 치달았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1954 윤돈(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 침례회 총회에 안대벽목사 부인 이순도여사와 신세대의 기수 김광택집사(펜위익의 마지막 상속자, 볼티모어 메릴랜드 주립대 교수, 음악목사) 파송했다.

안대벽목사 서울 종로 침례교회개척(유종구전도사, 이은호청년회장...)

김용해목사 인천송림침례교회 와 고향 전북 송천침례교회 개척


또한 1956년에는 아세아 침례회 청년대회에 김인영, 김광택, 김한희(차후 여선교회 회장 김한희 세계선교센터) 제씨를 파송한다.

결국 안대벽목사 대신 나선교사의 보필자 노릇을 하던 대전 침례회 신학교 교무과장조응철목사가 사임을 하고 물러났다

조목사가 물러나고 노장파와 소장파는 점점 세력이 균등해 지면서 서로 물러설 없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1956 노장 포항파의 리더격인 안대벽목사와 사모 이순도 여사가 미국 와싱톤에서 개최돈 세계 침례회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서 국제적인 위신을 세우고 귀국했다 침례회사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해, 워싱톤 몽고메리침례교회에 사역하시던 김승학, 강경 박성태, 대전 민영호, 황산 전흥상, 원주 이창송( 뉴욕 목사원로회), 경동 제영기, 충남 윤상순, 조치원 유영근, 마산 최영선, 용담 이덕여, 청주 유태근 전도사들이 해교회?에서 각각 목사안수 받았다.

김장환목사님도 충남 신흥에 교회를 개척했다.

 

1957 노장 포항파 리더 안대벽목사가 다시 총회장이 되면서 1951 설립된 재단법인의 5인이사에 김용해, 신혁균, 김주언, 안대벽과 나요한선교사외에 이대복(래이), 라일(부산침례병원장)선교사가 이입되어 안대벽목사를 경계하는 세력이 형성되었고 재단과 총회 주소를 부산에서 서울 충무로 5 55번지로 이전 했다.

이해에는 3 29 대전시 목동에 자리 잡고 있던 대전 신학교의 웅장한 신축교사 강당에서 1 별과 졸업식으로 39명의 장래 사역자들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교장 나요한 선교사가 사임하고 2 교장 도월태(T.H.Dowell)교수가 부임 했다.

이해, 1957 7 29일부터 있었던 교역자 수양회는 부산과 충남 무창포에서 나누워 개최가 되고 주류파 안대벽목사, 소장 반대파 장일수목사라는 양대산맥이 드러나면서 10여년의 분단시대를 예고했다.

타교파에서 전입한 교역자들과 장일수 목사가 지속적으로 나선교사측과 연합되고 주류파는 제안서를 발표하는 나름대로 연합을 위해 노력하고,

결전의 1958년이 밝아 오면서 14일부터 전국 교역자 173명이 대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청지기라는 남침례교 사신단(청소년주일학교) 첫번째 다짐 같은 표어 아래 전국  교역자 부흥 강습회 가지면서 새로운 부흥을 꾀한다.

부흥회 강사로는 미국 남침례교회의 저명한 부흥강사 무어박사와 오크라호마 주총회 디랙터 그라인스랩박사가 내한했다. 침례교로는 역사 깊은 울릉도에 구호병원도 설치되고 남북분단으로 인해 초래된 북쪽 출신 목회자들의 재혼이 금지되었다. ‘교회의 신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대전 신학교에서는 2 졸업생을 배출했다. 계속되는 부흥 발전 속에서 1909 설립된 역사 깊은 점촌침례교회는 유명한 김주언집사등 인사들이 있었지만 분규되는 아픔을 격었다. 또한 대립상태에 있던 주류파와 소장 반대파가 마지막으로 점촌교회에서 총회를 마치었다.

1958 48 침례회 총회에서 안대벽목사의 사모 이순도(마리아)여사는 1954 창립하여 사역해 오던 여전도회(전국여선교연합회)’ 교회순회전도사로 선출되면서 하나의 기관으로 확고히 정립하였다.

1958년초 나요한선교사 자택에서 개최된 미종근목사 신년파치에서 발단 나선교사와 안대벽목사의 논쟁은 교단 분열의 불을 당기게 되어

1959 3 18 미남침례교 선교부는 대전 신학교에서 있었던 한미전도부 연석회의에서 당신 총회 전도부장과 부인회 회장이었던 안대벽목사 이순도 사모 불신임안을 선포한다.

이에 곧바로 총회 실행위원회가 반박 성명을 발표하고 당시 미국 남침례회 동양총무  크로리박사에게 총회 실행위원회 결의안 보낸다.

당연히 반대파였던 장일수목사는 회의에 불참하고 신진 두뇌였던 한태경목사(워싱톤DC한인봉사센타설립운영) 회의에 불참했다.

이로써 곪았던 대립은 표면으로 드러나고 예정되었던 1959 포항총회에는 젊은 소장파 교역자들은 참석하지 않고 자기들 스스로 대전 총회를 따로 개최하였다.

해서 이름하야, 주류 노장파는 포항파로 소장 반대파는 선교사의 근거지와 같은 신학교가 있는 대전에서 총회를 개최하였다 하여 대전파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나요한 선교사가 가깝게 지내던 부친을 천거하여 부임한 인천 숭의동 고아원이 대전측에 귀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전측 간부와 선교사들이 원장이시던 부친과 가족을 추방할 목적으로 당국에 진정서와 고소장을 제출 했다.

당시 분열하면 재산의 소임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보고 그리하였을 것이다.

대전 측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고아원생들 충동시켜 난동을 일으키도록 했다는 것이다.

1959 봄이다. 모친은 김용해 목사님이 서술하신 기록에 ‘59 이라고 적어 놓으셨다.

당신 원생들은 625동란 전쟁고아들과 아직 북한을 오고가는 공작대들이 지뢰밭 통과용?으로 납치해오는 북한 소년병들이었다. 그들은 나이가 훨씬 많은 형들이었다.

대부분은 럭비와 깡패로 유명했던 수봉산 넘어 인천공고에 다니고 있었고,

나중에 북한을 오가는 공작대?(원배?) 사람들도 있고 419의거(풍길형?) 목한 형들이기도 하다.

북한에서 소년병으로 잡혀온 성찬이형은 북쪽에서 적령기에 공부를 못해서 한스러워 . 그래도 학구열이 대단해서 내가 고등학교때 배우던 지구과학(지학)’ 대한 이야기를 듣고 너무 신기해해서 지학 교과서를 빌려가기도 했다. 남은 공부를 해야 하는데ㅋㅋ

 

하여간, 이미 학령기를 넘긴 형들은 사실 고아원에서 나오는 구제품을 고아원 밖으로 빼돌리는 일들이 주업이었다. 험악하기로 유명했던 9번지는 아마도 고아원에서 나오는 구제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당연히 순박한 부친은 이런 일에 방해되는 원장이였고 이들은 반대파 사람들과 공조를 하게 된다.

그들은 권총까지 집어넣었다.

고아원 원장으로 계시던 짧은 3-4년동안 나중 인천산성침례교회의 이천수목사가 사역한 인천숭의침교교회로 사용되어던 2 창고건물도 짓고 빨래터와 우물옆 세면대 여름목욕탕 그리고 수십계단 이었던 2 강당까지의 돌계단등을 지으셨다.

짧은 동안 많은 일을 하셨지만 난동 다음해

1960 9 5 당국에 의해 고아원은 폐쇄 되었다.

없는 원생들은 점촌, 강원도 원주등으로 흩어지고 몇몇은 가까이 있던 인천 주안의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나이가 많아 고아원으로 없었던 형들은 자주 돌아오곤 했다. 그러고 보면 와서 살다가 원생들도 많다.

보다 서너살 많던 아이는 국민학생이던 때에 돌아왔는데 결국 년을 지내다가 집의 돈을 훔치는 바람에 오마니가 내보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아니한다.

하여간 여러가지 세상적인 분쟁속에서도

1959 1 홍성의 김갑수전도사가 목사안수를 받았다.

2 소천하신 김갑수목사님은 김용해목사님처럼 많은 일들을 하셨다. 교단총무로 대전침신기숙사 사감으로 등등 서울에 수도침신이 서기전 있었던 대한침례신학교 분교가 인천 고아원 터에 생기면서 잠시 머물러 있으셨던 동안 같이 지낸 아들들은 아직도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사모님을 닮았던 누나와 큰덩치에 순진무궁했던 큰아들 용선, 머리 좋은 둘째 용갑? 그리고 정말 어린아이였는데도 모든 아이들이 좋아했던 3째 용태, 그리고 베이비였지만 똑똑하고 귀여웠던 막내 베이비 용기

모두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분열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통을 격은 것은 답동교회와 부속 시은학교 였을 것이다.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편 인천 시내에 있는 시은 고등 공민학교를 또한 강제 점령 하려고 당시 이봉래교장을 축출 목적으로 일부 직원들을 사촉하여 분쟁을 시키는 여러 방법으로 쟁탈전을 전개하여 교계는 물론 일반 사회까지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키는데 이르렀으나 뺏지 못하고 학교 측에서는 방위에 개가를 부르더니 자가당착으로 학교에 교회 대지 사용하는 일을 둘러싸고 인천 교회 측과 시은 학교간에 심상치 않은 충돌이 폭발되어 인천 교회 측에서 문제로 총회에 진정하였으나 별다른 해결책을 얻지 못하고 돌아간 태도를 돌변시켜 대전 측과 합세하여 학교까지 완전히 탈환하여 대전 측에 넘겨 주는데 까지 이른 것이다.’


사실 이일에 대해 부친께서 관계자들의 실명을 들어 이야기를 몇번 해 주셨는데, 당사자들이 내가 기억해 낼 만한 분들이 아니여서 누가 우리편이고 반대편이고 하는 이야기들은 전혀 기억해 낼 수 없다.


또한 침례회 총회 기관지이던 침례회보도 소장 대전파로 넘어가 편파적인 기사를 내었다.

이에,   측이 합동제안을 결의 하지만 서로 달라서 추호도 양보 기세를 보이지 아니하였다.

하여, 이런 상태로 10여년 분열 시대를 보내게 된다.


1960 LA 싸이프러스 침례교회에 시무하시고, 그유명한 산호세 콩코드 침례교회의 길영환목사 장인이신 부산 남용순, 구항 이덕흥, 임곡 김의호, 월포 한성지, 월산 이윤상 전도사가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61년에는 아직 한국에서는 정체를 알지 못했던 국제 기독교 연합회(ICCC)’ 조건부 가입을 가결하였다


또한 아직 여지가 남아 합동추진위원 선정되고 선교사 3 입회하에 무조건 합동 만장일치로 가결되기 하지만 반전이 일어나 분열은 지속되게 되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516 군사혁명으로 지시에의해 교단등록과 재단법인 등록이 이뤄졌고

서울 박경배(LA로 이주하여 안대벽목사가 세운 '대한침례교회' 후임으로 사역 후 은퇴), 부산 이덕근, 전북 용안 조병우 제전도사가 목사안수를 받았다.

  

 

 

출처 : 다비드 킴
글쓴이 : dbyok 원글보기
메모 : 침례교회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