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네스토리우스
제4강 도마와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의 전래
1. 사도 도마의 동양전도설
인도인의 전설 중에 바울이 소아시아를 전도할 때, 도마와 바돌로매(나다나엘)는 동방으로 선교하여 도마는 인도에서, 바돌로매는 중국에까지 들어가 전도했다고 한다. 남인도의 말라바르(Malabar) 교회 전통에 따르면 처음으로 사도 도마가 인도 동쪽 해안에 있는 마드라스(첸나이)에 도착하여 전도하다가 점차 서쪽으로 옮겨 말라바르에 정착하여 전도활동을 벌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의 전도 활동은 중국까지 확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말라바르 교회가 쓰고 있는 기도일과서 안에 ‘성도마 제식문’이 있는데 그 내용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성도마를 통하여 우상숭배가 잘못이라는 것이 인도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성도마를 인하여 중국 사람과 에디오피아 사람들이 진리를 알게 되었으며... 성도마로 인하여 생명에 관한 교리의 광명이 전 인도에 퍼지게 되었다. 성도마로 인하여 하늘 왕국이 저절로 날개를 펴서 중국에까지 가게 되었다.”
말라바르 교회에서 사용하는 찬송가 중에도 도마에 관한 구절이 발견된다. “인도 사람, 중국 사람, 페르시아 사람, 그리고 해도(海島)의 모든 사람들, 또 시리아, 아르메니아, 자바, 루마니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도마를 추모하며, 그 이름을 높이어. 아! 그대는 우리를 구원한 자라고.”
초기 기독교 역사가들 중에 도마가 인도와 중국에 기독교를 전한 복음의 창시자로 보는 예가 발견된다. 3세기에 활약했던 도로테우스(Dorotheus) 감독은 도마가 발데아, 미디아, 페르시아, 로마, 박트리아 사람과 조로아스터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한 후, 인도에 도착하여 전도하다가 카르미나에서 순교한 것으로 기록했다. 이같은 전통에 입각하여 말라바르를 중심한 인도의 기독교인들은 도마가 인도 기독교를 창시한 인물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가야의 김수로왕이 인도 여자인 허왕옥과 결혼했는데 허왕옥이 이미 도마에 의해 복음을 들었기 때문에 가야에 복음이 들어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허왕옥이 가야에 도착한 시기는 AD 48년 7월 27일로 본다. 김수로왕 역시 인도 사람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충남대 도수희 교수, 백제어를 37년간 연구했다) 김수로가 허왕옥과 통역을 끼지 않고 자유롭게 대화했으며 허왕옥이 언제 어디서 올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인도의 같은 지방 출신이라고 본다. 이들 인도인들이 결국 김해 김씨의 조상이 때문에 김해 김씨는 얼굴이 까무잡잡하다고 한다. 이때 들어온 기독교는 불교의 형태처럼 한국에 남아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다 추정에 불과하다.
또 H.B. Hulbert 선교사가 남인도의 드라비다어와 한국어의 유사성을 주장했고, 캘커타 한국문화원 원장인 권병희 선교사가 인도 서벵골주와 방글라데쉬의 벵갈어와의 유사성을 주장했고, 네팔인 기안 스레스타(Dr. Gyan I. Shrestha)가 한국어와 네팔어의 관계에 대해, 또 콜롬보의 한국선교사들이 스리랑카의 싱할리어와 한국어가 유사한 점이 많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대단히 재미있는 지적들이다. 만일 언어적 유사성이 정말 밝혀진다면 인종족 유사성도 분명히 밝힐 수 있을 것이다.
2.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의 동방 선교
보다 실증적인 기독교 복음의 동양 확산의 역사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역사에서 발견된다. 네스토리우스(Nestorius)파는 AD 431년에 에베소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는데 그 이유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네스토리우스파는 이단이라는 누명을 쓰고 로마제국에서 추방되었다. 그의 제자들은 페르시아에서 선교했고 페르시아를 기반으로 인도의 말라바르, 아라비아, 중국, 몽골까지 퍼져나가 전도를 했다.
1625년에 발견된 비석 머리에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비에 시리아어와 중국어로 네스토리우스 선교사가 어떻게 중국에 와서 선교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비에 의하면 알로펜(Alopen, 아브라함의 중국명)을 단장으로 하는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한 것은 AD 635년이었다. 이때가 당나라 태종 9년이었다.
알로펜 일행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당태종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태종은 알로펜의 설교를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선교를 허락해 주었다. AD 638년에는 토지도 하사하고 국비로 파사사(波斯寺)도 건립하게 했고, 경전을 번역하게 함으로써 중국 선교의 길을 크게 열어놓았다. 후에 그 교가 로마에서 전래되었음을 알고 로마를 의미하는 한자 ‘대진(大秦)을 넣어 대진교(大秦敎)라 불렀다. 대진승(大秦僧)은 네스토리우스 신도를 의미하고, 대진사(大秦寺)는 그 사원을 의미했다. 그러다가 광명정대한 종교라는 의미가 담긴 경교(景敎)란 칭호가 사용되기 시작하여 ’대진경교‘(大秦景敎)란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다. 알로펜은 641년 이전에 <서청미소소경(예수메시아경)>, <일신론>, <일천론>, <세존포세론> 등 경전을 번역해 냈다. 경교는 결국 불교의 한 종파로 자리잡았다. 이들은 목탁을 두드리면서 복음을 전했고, 예배당을 불교의 사원처럼 지었다. 불교 신자와 같았다.
태종에 이어 고종도 경교를 보호했다. 고종은 경교를 진종(鎭宗)이라 했고, 전국에 경사(景寺)를 건립했고 알로펜에게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란 칭호를 붙여줄 정도로 후대했다. 그래서 수도인 장안이외에도 낙양, 영무, 주질, 사주, 성도, 공주 등 전국에 경교가 융성했다. 고종이후 측천무후가 통치할 때 경교 활동이 약한 주춤한 것을 제외하면 현종, 숙종, 대종, 덕종에 이르는 1백년 동안 경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융성했다. 중국 고위 관리 가운데 알로펜을 영접한 방현령을 비롯하여 명장 곽자의와 그 밑에 있던 이사가 경교 신자로 유명하다. 그러나 AD 845년 무종의 명에 의해 삼이사(三夷寺), 즉 경교, 회교(이슬람교), 요교(조로아스터교)에 대한 금교령이 내려 약 4백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 원대에 이르러 재흥했는데 돌궐 계통 위구르, 네이만, 케레이트, 온구이트족들 가운데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들이 몽골족을 따라 중국에 들어왔다. 칭기스칸의 양아버지인 케레이트의 수장인 토그릴과 그 부족은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이었고, 심지어 칭기스칸의 아버지인 예수카이도 그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칭기스칸의 며느리는 모두 100%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인이었다. 원의 야사(몽고대법전)에 보면 1조에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라는 표현이 나온다. 원대에는 경교라 하지 않고 야리가온(也里可溫), 아이개온(阿爾開이溫)이란 칭호가 붙여졌다. 쿠빌라이도 불교도였지만 야리가온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영국인 여류 고고학자 고든(E.A. Gordon)은 한일합방 무렵에 한국에 4년간 머물면서 불교 사찰을 살펴보고 한국 불교와 경교의 연결 가능성을 제시했다. 특히 경주 불국사의 석굴암의 관음상, 나한상, 제석천상 등과 통일신라시대의 능묘에 나타나는 십이지신장 부조나 능 앞의 무인상에서 페르시아의 경교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고든의 주장은 김양선 목사에 의해 받아들여져 1956년 경주에서 돌십자가가 발견이 된 것, 또 전남 해남 대흥사에 소장되어 있는 동제 십자가, 그리고 마리아상과 유사한 관음상을 예로 들며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을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