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스크랩] 기독교와 역사 (2)

INJESUS 2012. 6. 21. 11:18

6. 기독교와 역사서술의 객관성

 

기독교적 진보 개념은 12세기에 이르러 Jdachim에 의해 섭리와 역사와의 관계를 양분화 시킴으로써, 기독교적 진보관이 근대적 세속적 진보 개념으로의 탈 바꿈을 가능하게 되었다. 이같은 배경아래서 전통적인 유대교적 기독교적 역사이해가 방기되자 궁극적인 문제의 답을 역사 그 자체 속에서 구할 수 밖에 없었다. 역사주의 자들은 역사적 방법의 엄밀한 이용에 의해서 사실을 허위로부터 구별하려고 했으며, 역사는 가치를 탐구 할 뿐 아니라 생의 안내자의 역할 까지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결국 역사가 기독교와의 관계가 어떻게 수립되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귀착된다고 본다.

 

학자적 자유를 귀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선입견 없는 탐구적 노력을 통하여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전문적인 역사가가 되는데 필요한 요소와 훌룡한 크리스챤이 되는 요소가 결코 대립적이 아니며,

공통성을 띠고 있다.

훌룡한 역사가가 갖추어야 할 첫째 요건은 좁은 지역주의나 파당주의를 극복하고 역사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갖는 것이다. 토인비나 랑케등이 몇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훌룡한 역사가로 평하는 것은 기독교적 형제애와

통일성의 훈련에서 온 전 체적인 파악 때문이다. 두번째의 상사점은 판단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역사들은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운동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세번째의 특징적 자세는, 양편 다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문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끝으로 지적되는 크리스챤 사가와 비기독교 역사가와 공통점은 양쪽 다 현실의 평가에 있어서 보다 더 상대적 입장을

취하며, 역사적 현상에 대한 절대적 정당화를 삼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기독교 역사가는 도덕적 기준이나 불변적

도덕이 있을 수 없으며 이것은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버터필드는, 기독교와 역사 그리고 다른 학문과의 관계를 설정하는데 있어서, 갈등관계보다는 포용의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리슨과의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그는, 역사가의 기독교는 역사연구에 두 가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첫째는 전인간 드라마 개념의 관건이 되는 역사의

방향지침을 제시하고, 둘째로 기독교적 신앙은 역사에 대한 과학적 접근의 범위를 축소하고, 역사가의 과업은

어느 의미에서 한정적이라는 사실을 인식케 하는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한 역사가가 선택하는 사료는 곧 그 역사가가 처한 상황의 제한을 받는다. 영국외무성에서 나온 자료만을 근거로 한

역사 서술은 결국 영국 외무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결과가 되고, 다른 자료 접근의 한계는 곧 역사가의 한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볼 때 역사는 그 자체가 갖고 있는 특성에 의해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의 고유성을 정신적 판단, 특수 과학적 성격, 독자적 타당성으로 구분하고 있다. 역사는 단순한 피상적 편찬이

아니라 오랜시간을 거친 정신사적 축적일 뿐만 아니라 세대와 시대를 거친 오랜 연구결과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역사의 고유성의 인정은 그것이 갖고 있는 독자적 영역을 설명해 주고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객관성의 한계를 또한 깊게 시사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학술적 역사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의미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어딘가 기술적인 영역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

것은 학문의 왕자도 아니며, 종교의 대용물도 아니요, 그 자체가 완전한 교육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Butterfield의 태도는 역사적 상대주의와 일맥 상통하는 점을 갖고 있다.

물론 이같은 역사적 상대주의의 출현은 기독교와 밀접히 관게되어 등장한것은 아니지만 객관적인 역사, 결정적 역사

절대적 타당성을 지닌 역사추구가 갖는 한계점을 규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주의는 모든 현상을 역사성 밑에서 해석하려는 시도였다. 역사주의는 가치의 역사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가치, 규범, 제 규준의 절대성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가치란 역사적 상황에서 제기되고 역사에서 일어난것은 무엇이든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외적 기준에 의해서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역사 속의 개인, 제도, 어떤 역사적 행위도 내재적인 고유한 가치에 의해 판단이 되므로, 사실상 어떤 고정된 합리적 기준을 설치할 수 없었던 것이 역사주의 자체가 갖고 있는 성격이었다.

역사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몇가지 이유 중에서 무엇보다 기본명제가 되는 것은 순수객관이 무엇이며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역사가 다루는 사실들은 결코 순수하게 오지 않으며,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도 존제할 수도 없고

그것은 언제나 기록자의 마음을 통해 굴절하기 때문에 순수한 객관적 사실이 역사기록 속에 존재 하기란 힘들다.

뿐만아니라 역사가가 수집한 증거나 사료는 처음부터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또 전 사료의 접근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단순한 사실과 의미있는 사실들을 구분해야 되며, 그 과정에서 역사가의 인생관, 가치, 취향이 작용한다는 뜻에서 선택적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선택적 행위에 의하여 기술되고, 재구성된 역사지식은 그 출발부터 대상에 대한 판단에 의해서 평가된 결과라고 볼 때 그것은 이미 가치부가적 성격을 띠고 있다.

역사는 자료로부터 뽑아낸 사실들의 전체적인 총계가 아니다. 역사는 은밀한 자료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 전에 이미 존재해 있는 것을 역사가의 탐색을 통해 재발견하는 것에 불과하며 엄밀한 의미의 재 구성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자료도 그 자체만으로는 역사적 자료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이 역사가의 역사적 탐구정신에 의해

조명되었을 때 만이 그것은 역사적 자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의 가치는 엄격하게 역사가의 능력에 의존하게 된다.

역사 자체가 갖고 있는 객관성의 문제는 종교적 전제에 의해서 희생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역사자체가 갖고 있는 성격

때문에 안아야 할 한계적 과제라는 점을 우선 지적하고 싶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기독교와 역사적 객관성의 문제는 갈등관계에서 파악할 것이 아니라 이해적 입장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적 신앙을 가진 역사가가 서술하는 역사가 모두 편견적도 아니며, 사회과학도 또는

무신론적 입장에 서 있는 사가가 쓴 역사가 완전한 객관성을 드러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기독인의 입장에서도 당위론적 이유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왜곡,조작시켜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역사적 탐구의 궁극적인 목적은 어떤 객관적인 사실의 확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들에 직면하여 그것들의

의미를 탐문하고 타인의 삶과 관심을 이해하는데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역사가는 삶에 대한 기독교적 조망의 관점에서 인간의 삶을 해석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하며,

인간에 대한 기독교적 지식의 맥락에서 실제 역사적 사건의 본질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점에서 볼 때 역사학 역사신학의 입장은 그 자체의 고유성을 잘 보존하면서 상호간의 부족한 점을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서야한다. 역사적 사실의 한계성을 인정하여 그것으로 설명되지 않는 난제에 대한 해답도 구해야 한다.

 

 

 

7. 크리스챤은 현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현대사를 어떻게 볼것인가의 문제제기는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번민과 고뇌의 단적인 요약적 표현이다.

 

어떤대상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인식의 주체가 어떤 “인식의 틀”을 갖고 있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대상보다는 인식 구조가 먼저인지 모른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대상의 인식범주는 인식의 틀안에 들어오는 한에서만 허용된다.

역사에 대한 이해나 해석은 그 문제를 접근하는 태도와 시각에 따라 그 해답이 달라질 수 있다.

역사에서 일어났던 많은 사실들이 역사의 사실로 재구성 되는 과정에서 인식틀의 영향이나, 가치부과적 당파성을 띠고

해되어 온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현대는 절대 가치의 붕괴시대라 볼 수 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가치혼란을 겪고 있으며, 제 분야의 불확실성에 시달리고 있다. 또한 물질 문명의 거대한 힘을 소유하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심한 좌절감과 불안에 떨고 있다.

문명과 정신의 괴리에서 오는 소외와 인간존엄성의 퇴락이 곳곳

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상징적으로 대변하고 있듯이 전래적인 모든 가치나 권위는 무참하게

무너져 내렸다.현대 문명은 양적으로는 선장하였으나 질적으로는 크게 개선 된 것 같지 않다.

그 이면에는 좌절과 절망감이 먹구름처럼 깔려 있는 것 같다.

이같은 현대를 위기로 볼 것인가 아니면 희망으로 볼 것인가 히는 문제는 현대사 이해의 갈림길이 되는 매우 핵심적인

질문이다. 스스로 구제할 수 없는 인류사의 한계를 인지하고 있다고 하까?비록 단계적 시련은 있을지 모르나 언젠가

인류는 이상적인 또는 유토피아적인 세계를 이 지상 위에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신봉자인 것이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역사가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이 지난 수 천년간의 인류사가 증명해 주고있다.

종교는 이데올로기는 아니지만, 부의 분배, 구조적 모순의 해결, 바른 삶에 대한 바른 보상, 인간소외의 극복과 같은 개선을 역사 속에서 구현해 나가야 하는 사명을 지닌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이라고 했다.인간의 한계성과 역사적 미완성의 속성을 인지한다면,현대인들의 위상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의 방향과 출발점은 설명된다.

 

 

 

Ⅱ. 크리스챤의 역사해석

 

 

1. 기독교 역사관 (Christopher Dawson)

크리스토퍼 도슨은 기독교 역사관의 연구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인본주의자와 일부 기독교인의 비판으로부터 기독교 역사관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역설하고

 

그런 연후에 그는 직접 문제의 핵심, 즉 “때가 찼으므로” 성취된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으로 뛰어 들었다.

도슨의 접근 방법은 모두 포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에서부터 그리스도, 그리고 바울, 어거스틴, 비데,

단테로 이어지는 기독교역사관의 발전을 개관하고 있다. 그는 기독교에서 태어난 세속적인 자녀들인 마카야벨리, 홉스,

마르크스를 소개한다. 도슨에게 있어서 보편의 교회는 역사의 비밀과 인류의 구속을 걸머쥐고 있다.

피히테, 셸링, 헤겔과같은 19세기의 거의 모든 위대한 관념 철학자들은 정교한 역사철학을 수립했는데, 이 역사철학은 위의 역사가들과 신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런 모든 체계들은 기독교 사상에 의하여 자극을 받거나 기독교적으로 채색되었기 때문에 신학자들은 변증학상의 목적을 위하여 이 철학체계를 열심히 수용하였다. 그 결과 관념철학과 독일

신학의 연합이 일어났는데, 이 연합은 뒤에 자유주의적인 신교운동의 특징이 되었으며 또한 지난 19세기 동안

유럽대륙과 영국의 종교적상황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철학적인 관념주의와 자유주의적인 신교주의는 거의 물러가고 대신 그 자리에 논리적 실증주의와

발트의 변증법적 신학이 들어섰다.

기독교 철학은 헬라적이며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 역사 해석은 이런 전통이 아닌 다른 곳으로 부터 유래한다. 즉 기독교 역사관의 기원은 그리이스 사상보다는 히브리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기독교 신앙의

일차적인 문서들-히브리 선지자들의 글과 신약성경 자체-속에서 충분하게 표현되고 있다.

기독교 역사관이란 역사가 신의 섭리에 의한 것만이 아닌, 분명한 역사의 시간과 공간속에서 항나님께서 직접 인류의

삶 속에 개입하심을 믿기에 기독교 신앙의 중심교리인 성육신 교리는 동시에 역사의 중심교리이기도 하다.

기독교 성육신 교리는 단순한 신이 인간에게 계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성품을 새로운 어떤 것으로

서서히 변화시키는 새로운 영적인 원리이다.

역사의 내적인 의미는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의 진행속에서 발견되어졌다.

이런 선지자적인 역사관이 교회에 의해 받아 들여졌으며 보다 광범위하고 보편적으로 적용되었다.역사의 내용을 바꾼

신적인 사건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장벽도 허물어 뜨렸으며 그 결과 서로 분리되어 있었던 두 인류가 새로운

세계건축의 머릿돌인 그리스도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어거스틴의 이론에 있어서 사랑이 바로 사회의 법칙이며, 원심적이며 파괴적인 힘인 자기애가 지상의 왕국의 분열된 사회를 형성하듯이, 창조적인 능력인 신적 사랑은 역사 속에서 서서히 실현되어 가는 영원한 교제속에서 선한 의지를 가진

모든 인간을 연합시키는 사회인 신의 도성을 형성한다.

기독교 역사관은 영원을 통한 관점으로써, 영원을 통하여 시간을 해석하고, 신적 계시의 빛을 통하여 인간의 사건을 해석한다. 때문에 기독교 역사는 필연적으로 묵시적일 수 밖에 없으며, 기독교에서는 이 묵시가 세속적인 역사 철학을 대표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한 시대의 종말과 세계의 종말을 구별할 수 있게 되며, 또한 기독교 시대와 기독교 문화란 단순한

천년왕국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과 투쟁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 세상임을 직시하게 된 것은 로마제국이 기독교화되고 교회에 평화가 찿아온 이후의 일이었다. 이런 역사관이 고전적으로 표현된 곳이 바로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이었다. 이 책 속에서 어거스틴은 국가의 진정한 목적은 신의 도성의 보다 높은 성과 일치하기 때문에 국가의 진정한 성격은 권력에의 욕구와

자의지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이런 권력의 욕구와 자의지에 의하여 인간사회가 파괴되는 것을 막기위한 필수적인 방법임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어거스틴은 역사진행의 진정한 중추는 개인의 영혼이라고 하였다.

신적인 사랑의 능력이 인간의 의지를 움직이는 모든 곳에서 신의 도성은 건축되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관과 비교해 볼 때 마르크스주의적 견해는 근본적으로 안목이 짧으며, 그 의미란 주로 현대 서구 사회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경제적 변화에만 집중되고 있다.정치적 선동의 영역에서 공산주의가 즉각적인 효과를 거두는 이유는 설명이

되나,보편적 역사 이론으로서의 철학적 가치는 크게 손상된다.

교회는 여전히 역사의 비밀과 인간 구속의 조직적 노력을 지키며 남아 있다.저 세속적 이데올로기에 비하면 교회는

아무런 즉각적 해결도 할 수 없음이 사실이다.그러나 기독교적인 해결만이 유일하게 역사속에 들어있는 미지의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요소에 충분한 비중을 부여하고 있다.

 

 

 

3. 기독교와 역사이해

(kENNETH s.Latourette)

 

라토렡은 기독교 역사관의 몇가지 중심적인 요소들-하나님의 주권, 그리스도의 성육신, 기독교의 보편성, 사랑의 동기,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교제-을 개관하고 있다. 그는 세계속에서 이루어지는 기독교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유산인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의 진리성”을 지시해 준다고 믿는다. 그는 두개의 방대한 저서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기독교확장사와 혁명의 기독교”가 그것이다.

기독교적인 역사이해는 계속해서 십자가의 부활 이후에 하나님은 기독교인이 성령이라고 부르는 영을 통하여 이해되어진다. 기독교란 복된 소식이라고 불렀다. 복음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은 다른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고집과 죄를

분명히 밝힘으로써이다.

또한 복음은 고집과 죄를 정복하기 위하여 생명을 풀어 놓는다.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이다.

역사의 과정이란 곧 하나님이 인간을 찿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심판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시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며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바로 여기에 역사의 의미와 모든 것을 통일시키는 핵심이 있는 것이다.

만약에 기독교적인 역사관을 다른 역사가가 현대의 다른 역사가들의 기준으로 인정을 받고자 하면 첫째로, 일반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관점과 가치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역사를 보시듯이 역사를 보기 위해서는 평상시에 무시했던 사건들에 주의를 집중시켜야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개인을 몹시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을 존중한다. 모든 개인은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지음 받았다. 세째로, 예수께서는 인간의 사회구조를 무시하지 않았다. 네째로, 역사관은 역사와 시간이 영원에 의하여 둘러 싸여져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역사의 중심에 놓여지며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활동하는 분으로

이해된다.

만약 하나님이 사랑이며 또 주권자라면 그의 심판은 그의 사랑의 승리를 위한 한 방법임이 틀림없다.때문에 십자가에

뒤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하여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자유롭게 받아들인 사람들의 생애

속에서 새롭게 능력이 흘러 나왔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역사가는 하나님께서 역사 안에서 승리를 거두실지, 역사의 피안성에서 승리를 거두실지를 알지 못한다.

또한 그는 기독교적인 역사의 타당성을 결정적으로 제시할 수도 없다. 그럴찌라도 인간의 이성에게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이론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7. 역사와섭리

 

역사가들은, 우리의 사고력을 초월하여 진행되면서도 우리의 행동의 결과를 비껴가게 만들며 우리의 손에서 목적을

 빼앗아가며, 아직 실현되지 않은 우리의 노력에 종지부를 찍는 역사형성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인다.

 

역사가들은 어떤 사건이 아무리 깊이 되어지고 역사가들이 시간의 진행에 대하여 아무이 많은 것을 말한다고 할찌라도,

역사가가 완전히 연구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는 어떤 고정적 요소들이 존재한다. 사물의 구성 자체의 저변 자체에 깔려 있는 것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섭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물의 구조 자체에 내포되어 있는 섭리 외에도 우리가 인간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또 다른 섭리가 있다. 이 섭리는 우리에게 이런 인상-단순한 인상이라는 의미로 너무 치우치지만 않는다면-을 준다. 즉, 이 섭리란 인류의 집합적인

지식같은 어떤 것에게 끼치는 작용을 의미하거나 혹은 역사자체가 역사의 주도권을 쥔듯한 인상이 그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구조 자체에 내재된 섭리에 대한 이런 제한된 개념이라도 인간행위와 세계에서의 인간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개념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모든 일의 결과에 대하여 최후의 판결을 내리는 것은 바로 이 섭리이다.그래서 역사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고려에 넣지 않고도 설명되어 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충분하지 못하다. 이런 섭리적 배경은

인간의 영혼을 위한 훈도 역할을 하는 일종의 세상을 구성하며 또한 인간에게 그가 추구할 목표를 제공한다.

이런 섭리적 배경은 역사란 그 인격적인 특성에 의하여 본질적으로 도덕적이라느 것을 뜻한다. 이런 모든것을 고려해 볼 때 믿음은 신앙을 사진 사람을 위한 특별한 섭리이며 기독교 역사속에 있어서의 특별한 섭리이다.

믿음은 신앙을 가진 사람을 위한 특별한 섭리이며 기독교 역사속에 있어서의 특별한 섭리이다.그러나 우리는 이 섭리와

타협하거나 이 섭리가 우리에게 전쟁의 승리를 제공하거나 환난으로부터의 면제를 보장할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8. 기독교와 역사발전

 

1. 하나님 중심주의의 문화적 방향

역사란 종국적으로 인간의 정신이 물질과 제도라는 수단을 통해 자기구현하는 결실이라고 볼 때 서구인을 그다지도 동적,활력적,미래지향적,성취의욕적,변화지향적으로 만든 정신토대, 정신풍토가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서 먼저 주목하고 그 해답을 구한 후 여타의 요인들을 살펴봄이 더 생산적 접근방법인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기독교는 서구문명의 탄생기로부터

그 정신적 초석, 심리적 모태가 되었으며 르네상스기 이전의 서구인이 발전시킨 정치제도, 경제구조, 교회조직, 문학, 예술, 사상, 등에 기독교의 정신이 구현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즉 성서의 가르침의 가장 기본적인 사상은 철저한 하나님 중심주의인바, 이는 개인의 구원뿐아니라,

문화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신관 즉 숭고한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인간 문명에 끼치는 실제적인 영향은 그 신앙을 가짐으로써 미신적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고 또한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발전을 가져오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중심사상은 자연을 비신격화, 비성화, 비인격화하는 가장 힘있는 진리이며 능력이다. 하나님을 우주의 창조자로

신봉하는 개인이나, 사람의 집단은 자연을 숭배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자연 중심적인 낡은 세계관 대신에 하나님 중심의 새로운 세계관이 생기게 되었다. 성경은 어떠한 물질적인 재산도 우리의 것으로 소유할 수가 없음을 밝힌다. 단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물질을 관리하는 것이다. 물질에 대한 이런 소유개념이 후에 근대자본주의의 중요한 경제 윤리의 기초가 되었다.

인간은 사고와 행동에 있어서, 자기의 죄를 범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서, 자기의 유한성을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만 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어야만 인간은 정말로 창조적일 수가 있다. 이런 신관, 자연관, 인간관을 가질 때 만이 역사가

의미를 가지게 된다.

 

2. 내성주의와 상향주의

성서의 진리는 역설적이고 인간의 합리주의적 지혜를 가지고는 이해가 안 된다.

성자, 예수의 가르침도 우리의 인간적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죄의식과 회개(내성주의)는 사람을 하나님과의 관계개선으로 성령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첫 관문이다.

 이것은 개인의 사회적 책임감을 각성시키는 도덕심의 모체가 된다. 회개는 개인의 마음 뿐 아니라, 사회를 정화하는 맑은 샘이며 어두운 암흙을 헤치고 밝은 진리의 빛을 비춰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곧, 믿음의 지향하는 목표는 개인

구원이라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데 있다고 볼 때 기독교는 확실히 사회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진정한 진보는 사회 진보를 삶의 목적으로 삼고 분망하게 사는 사람들의 힘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부족을 매일 뉘우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영향으로 이루어 지는 경우가 더 많다.

회개는 시간적으로 볼 때 순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지만 그것을 논리적로 분석해 보면 첫째로, 사람의 죄가 극히 현실적이고 또 그 결과는 사망을 초래할 인자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죄의식은 사회성을 가진다. 그러니 죄의식은 사회 전체를 새롭게, 깨끗하게 하고 발전케 하는 정신적 바탕이 된다. 둘째로, 해방과정이다. 회개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도에 속박을 받는 것 같지만 실은 모든 것으로 부터 자유로워 지는 것이다. 세째,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주로 마음 속에 모시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바라고 또 우리 사회가 이루기를 바라는 모든 정치안정, 경제발전, 문화발전, 윤리질서의 향상은 하나님나라를 먼저 구하는 노력으로 할 때 부산물로 주어지는 것이 상향주의 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기독교는 확실히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기독교는 모든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초월하는 동시에

양자의 결함을 보충.보완 충족시켜줌으로써 참된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정신적 원동력이 된다.

그리스도교의 집합주의는 어떤 사람의 주장이나 지도력을 무조건 따르는 전체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본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3. 기독교적 항구혁명

기독교 신앙은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이성을 유효적절하게 사용하여 역사 발전을 촉진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자기 이성의 한계를 인지,인정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람으로써 이성을

올바로 활용하는 참 지혜를 체득한다.

사랑을 역사창조의 귀중한 원동력으로 만드는 능력을 준다. 역사의 종착역을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그의 공의가 다스리는 환경을 뜻하며, 사회적으로 보면 모든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됐다는 존엄성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입장에서 동등함을 인정하는 평등주의사회의 구현을 의미한다. 윤리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나와 너가 하나님을 위로 모신 삼각관계를 맺는 가운데 온갖 지배나 속박의 형태를 배격하고 사랑이 모든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이상향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현세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볼 때,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지표로 삼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헌신하는 삶은 개인의 행복 뿐 아니라 사회구제, 국가발전 나아가서는 인류를

발전시키는 가장 유효한 길이다.

 

4. 역사적 실증

기독교의 사적 실증을 우리는 서구문명의 탄생과 성장과정에서 끼친 기독교의 영향에서 실증적으로 찿아볼 수 있다.

역사속의 게르만민족이 이동하여 로마제국으로 들어올 때 그들은 교회를 통하여 기독교를 받아 들였으며 복음화되었다.

게르만인들이 교회를 통하여 받아 들인 것은 자연중심적인 세계관을 포기한것, 인간중심적 역사관으로 전락된 위험성을

피한 것과,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받아 들인 것이었다.

오늘날 서구는 윤리 및 가치관으로부터도 상당히 이탈되어 왔다. 비기독교화의 과정은 대략 세가지 관계의 영역에 그 영향을 미쳤다. 첫째로는 인간이 마음 대로 파괴함으로써 지나치게 파괴되었다. 둘째, 하나님을 끌어 내리고 그대신 그 자리에 올라 앉음으로써 그 위치가 전도 되었다. 세째, 인간대 인간의 적합한 관계를 위한 성경적 원리가 현대의 서구 생활 속에는 윤리의 기초가 되고 있지 못한다. 그 이유는 자기의 이웃을 자신의 목적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의 현대인들은 뒤늦게나마 역설의 법칙이 여기서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위로 하나님의 나라를 지표로 삼고 성서적 원리들을 생활화하는 운동을 하여야 한다. 성서적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 지표로 삼는다면 오늘의 갈등, 혼란, 위기, 불안등이 해결의 실마리를 찿을 것이다.

 

 

 

 

자료출처 : 등불 든 이의 삶.

http://blog.daum.net/yangsim3/14851740

 

 

 

 

 

출처 : 갇힌자들을 돌아보라!!
글쓴이 : 오네시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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